북한 군대에도 소위 '꿀보직'이 있다. 탈북민 출신 화가 오성철 작가는 그림 실력 덕분에 북한에서 의무 군 복무 시절 "비 안 맞고 햇볕 받지 않고 안에서 기술로 먹고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오 작가는 1994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동안 조선인민경비대 선동 선전부 '직관원'으로 복무하며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2012년 한국 땅을 밟은 그는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 화가의 길을 택했다.
오 작가는 북한의 직관원은 "자기 사유가 없는 기능공"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화가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회주의 미술의 가장 기본 핵심은 재연의 기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북한의 그림 중 자기 창작물은 없다"고 말했다.
오 작가는 북한에서 소위 '성분이 나쁜' 집안 출신으로 남포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산이 고향이었던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 발발 후 이남하면서 오 작가 아버지를 비롯해 남겨진 가족들은 '월남자'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오 작가 아버지의 두 형은 북한 정치범수용소인 득장수용소(평안남도 개천 제18호 관리소)로 보내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됐고 오 작가 아버지 역시 탄광으로 추방됐다.
오 작가는 "'우리 아버지는 일생을 왜 살았을까' 생각해 보면 내 밥 그릇에 밥을 이렇게 좀 채워주기 위해서 늘 그렇게 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새벽 6시에 일하러 나가 저녁 8시에 귀가했다"며 "그러고는 자식에게 콩밥이라도 먹이려고 단콩대를 하러 나가 양 옆으로 한 5대씩, 엄청 무겁게 10대를 끌고 2-3시간 걸어와서 다음날 또 새벽에 일어나 그걸 심고 줄단콩 씨를 뿌렸다"고 회상했다.
오 작가는 '노예처럼 살지 않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아버지 말에 따라 학교 수업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지만 수업 후 사회주의 체제 활동 일환으로 이뤄지는 '집단생활' 시간에는 도망가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는 "혼자 있는 시간들이 필요했고 그렇게 도망 갔다 오면 애들이 그걸 가만 놔두지 않고 집단생활 참가 안 한다고 막 괴롭혔다"며 "그러면 그걸 또 견딜 힘이 백 있는 부모도 아니고 돈도 아니니까 계속 그림으로 해결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오 작가는 17살에 군에 징집돼 고향 남포를 떠났다. 둘 곳 없는 마음을 달래주던 그의 그림 실력이 상관의 눈에 띄어 직관원으로 발탁됐지만 이전처럼 자유롭게 그리는 그림들은 모두 태워버려야 했다.
그는 "북한의 주체 예술론에 따르면 예술은 북한 체제를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북한의 예술가들은 항상 이 체제를 옹호하고 사랑해야 한다"며 자신이 직관원으로서 그렸던 그림들에 대해서는 "도안이 배포될 때 스케치로 사람이 어디 있어야 하는지 색이 몇 가지 쓰이는지 등을 적어주면 그것을 재현해내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오 작가는 대학 졸업 후 수산자원을 중국과 거래하며 외화를 버는 일을 했다.
오 작가는 또 인간 사회의 이런 정치적 속성과 특권층의 권력욕을 한국에서도 똑같이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는 "한동안 정치적인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대한민국이 이렇게 엉망일 줄 몰랐는데 국민들의 혈세로 호의호식하는 어떤 사람들이 수많은 국민들 앞에서 수준 낮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살던 세상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고 말했다.
오 작가는 목적성과 욕망, 이기성을 가진 인간 그 자체, 그것이 갖는 보편성을 표현하기 위해 그가 집에서 밥을 먹을 때 사용하던 숟가락을 재료로 삼았다.
이에 대해 오 작가는 "내 그림의 메커니즘이 스푼이 주메뉴이기는 하지만 스푼이 나왔던 이유도 어떤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을 가진 인간 자체가 제일 궁금했다"며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는가의 문제보다 그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던 어떤 인간이 궁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작가는 그 자신 역시 어떤 행위를 할 때 어떤 의도나 목적성 없이 순수하지 않다며 "숟가락은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표현이 다 스스로의 이기성을 위한 것이냐고 생각할 때 그 답은 예스라고 생각한다"며 "그것을 인정해야 그 이상의 보편성, 그 이상의 어떤 무엇을 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드디어 2012년 한국 땅을 밟은 오 작가는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 화가의 길을 택했다.
오 작가는 "나는 한국 영사관에 들어갈 때까지 탈북자라는 말 자체를 몰랐다"며 그보다 이전에는 "남조선이라는 곳에 갈 생각까지 못하고 그냥 이 나라, 진짜 수탈 밖에 없는 이 나라만 아니면 좀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와 미술 공부를 하며 철학서를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점이 가장 좋았다"며 그 과정에서 "인류 역사에서 그런 수탈이 북한에서 처음 생긴 방법도 아니고 국가라는 이름 아래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아 래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한서하 기자 silvertimes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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