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군에서 열녀 났다 박정순 여사가 보화원에서 열녀상 수상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송호리에 사는 박정순(朴貞順) 여사가 보화원(補化院)에서 실시한 제65회 보화상 시상식에서 열행상(제1801호)을 받으셨다.
대구 대명동에 소재하고 있는 재단법인 보화원은 대구, 경북지역의 효행자, 열행자와 선행자를 찾아 선발 시상하여 효 정신을 일깨우고, 이들의 행적을 만천하에 알려 세인의 마음속에 등불과 같은 귀감이 되고자 설립한 재단이다.
이날 수상자는 보화상 1명, 효행상 12명, 열행상 4명, 선행상 4명 등 모두 21명이 상을 받았다. 박정순 여사는 100년의 굴곡 진 삶이 우리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겠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열행의 공적을 살펴보면 박정순 여사는 음력 1919년 11월 22 일 의성군 안사면 만리리에서 태어나시어 1940년에 의성군 다인면 송호리 김문한(金文漢)씨에게 시집오셔서 시조부님과 시조모님, 시아버지와 시어머님을 모시고, 시동생 2명의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시아주버님은 일제강점기 때 뜻한바 있어 1940년 도일 유학코자 현해탄에 몸을 실은 것이 운명의 종말이 되었다. 항해 중 대마도해협에서 침몰로 실종 되시고 손윗동서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시고, 그 자녀 둘을 돌보며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 가셨다.
시동생 하나는 안계중학교(安溪中學校 집에서 12km 떨어 진 곳)에 매일 아침 일찍 식사를 해주어야 걸어서 학교에 도착하니 매일같이 새벽밥을 지어서 먹여서 학교에 보내셨다.
아들 4형제를 낳아 큰집에서 분가하여 남편 뒷바라지와 아들 4형제를 먹이고 입히는데 정성을 다하시고 남편은 매일 같이 농사일과 남의 집 일을 해주시는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쏟으시니 그만 속병이 나시어 갖은 고생을 하셨다.
그 후 아들 2명을 더 낳아 정성껏 기르셨다. 특히 시집 온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1941년~1943년 3년 동안 일본국 오사카 ○○ 해군부대에서 강제 노동지원(군수물자 운반, 근로 작업, 건설)으로 강제 노역을 하시다가 1943년경에 일본국에서 도망쳐 본가로 돌아왔으나 다시 검거령이 내려져 숨어서 예천군 까막수리 등지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시다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여 자유인이 되어 머슴살이도 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 오셨다.
강제로 동원 되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심의․결정 통지서”에 (김문한 1921년 3.10,) 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26조에 의거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되었다. 위원회 의결 (안건번호 220944(의성군-213) / 일자 2011.11.24.)로 명예를 회복하시게 되셨다.
본가로 돌아오셔서 남의 집 쌀을 빌려와 가을에는 2배의 쌀을 갚아주는 형편이 되었다. 그래도 맞아들은 공부를 대학까지 시켜서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해서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있다. 나머지 아들들은 공부도 많이 시키지도 못하고 농사일을 도와주다가 뿔뿔이 도시로 나가 지금은 자기 집을 지키면서 모두 잘 살고 있다. 박정순 여사 100세 축하연(2018년 12월 29일)은 마을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크게 잔치를 했다.
남편은 1996년 6월14일 별세하셨다. 1993년부터 3년 동안 암 투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박정순 여사는 암에 좋다는 풀뿌리며, 온갖 나무로 만든 조약(造藥)을 해주시고, 병간호를 극진히 해주셨다.
병이 매우 나쁜 것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은, 언제나 제 몸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어느 누가 즐겨 곁에서 따라다니며 간호했으며, 악취에 견디기 어려운데 코로 냄새를 맡으며, 새 옷으로 갈아입히겠는가? 부인이 음식은 반드시 손수 숟가락으로 떠 먹였으며, 의복도 손수 입혔으며, 머리 빗겨 주는 것도 항상 부인이 스스로 해주었다.
잠자리에는 반드시 요를 펴고, 이불을 덮게 하는데 항상 두 개를 펴서 겉과 속이 편안하게 하였다. 여름철에는 입힌 홑옷(기저귀)을 날마다 빨아 드리고, 그 아픈 부분을 날마다 주물러 주셨으며, 겨울철에는 대소변을 방안에서 청하여서, 조금도 찬 기운에 닿지 않게 하였다.
그 남편이 남긴 음식은 반드시 자신이 먹었다. 그 나머지 자잘한 일은 낱낱이 들 수가 없다. 그 암(癌)이 심해지자 문득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다만 3년만이라도 더 사십시오” 라고 하고, 입맛이 원하는 대로 혹은 시장에 가서 사서 드렸다.
마침내 돌아가신 날에는, 손수 묫자리를 봐서 절차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뜻대로 행하되, 모든 것이 보통 사람의 상례와 한결같이 하였다.
마을의 사람들은 칭찬하고, 돌아가며 말하기를 “절의를 지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기는 어렵다”라고 하였다.
박정순 여사는 103세에 재단법인 보화원에서 열행상을 수상하시니 박정순 씨에 대해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松泉 金永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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