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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세토 정신과 동양평화

이 준 기자 | 기사입력 2024/10/30 [10:59]

베세토 정신과 동양평화

이 준 기자 | 입력 : 2024/10/30 [10:59]

 

베세토 정신과 동양평화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지금은 잘 안 쓰이지만, 한때 ‘베세토(BESETO)’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다. 베이징, 서울 그리고 도쿄의 영문 알파벳 두 글자를 따서 붙인 신조어이다. 베세토 정신은 한중일 협력의 상징이었다. 문화든 경제든 교류하고 협력하면 서로 발전하고 풍요로워진다. 베세토 라인에 서울이 가운데 있는 것처럼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가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한중일 3국 간 갈등이라도 생겨 중앙 정부 간 해결이 쉽지 않으면 베세토의 지방정부가 나설 수도 있다.

한중일 3국은 오랜 기간 한자 등 동일문화를 공유하고 발전시켜 왔다. 또한 한중일의 지정학을 보아도 너무 가까워 이사 가지 않는 한 함께 살아가야 할 숙명적 이웃이다. 21세기 새로운 AI 시대에도 한중일 3국이 더불어 협력하고 공유할 것이 많을 것이다. 필자는 도쿄와 베이징의 대사관에 근무한 베세토 외교관이었다. 도쿄의 대사관에서 근무할 때는 한일 관계뿐만이 아니라 중일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주말에는 헌책방을 다니면서 장래 베이징 근무 시 필요할지도 모르는 중국 관련 서적을 수집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는 도쿄 시내 및 인근의 역사 유적지도 탐방하여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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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매립하여 조성한 도쿄의 긴자[사진=위키피디아]

 
도쿄는 본래 에도(江戶)라는 이름 없는 어촌으로 스미다강(隅田川)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었다. 습지가 많고 강물과 조수로 들어오는 바닷물이 쓸모없는 땅을 개척하여 오늘날 세계적 도시 도쿄의 기반을 만든 사람이 16세기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된 후 권력 투쟁에 승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비옥한 자신의 영지를 빼앗기고 척박한 황무지 에도로 강제로 내쫓긴 상황이었다. 이에야스는 창과 칼을 녹여 삽과 괭이를 만들었다. 강의 흐름을 바꾸고 바다를 메워서 농지를 만들과 사람을 불러 신도시를 건설했다. 지금의 도쿄 일왕이 거주하는 왕궁(皇居) 앞인 히비야 공원과 긴자도 모두 바다였다. 한편 히데요시는 지나친 욕심을 억제 못 해 조선을 침략,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7년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을 황폐화시키고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에야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히데요시 사후 그의 추종세력을 꺾고 일본을 다시 통일하여 에도에 막부(幕府: 일왕을 대신한 쇼군의 통치 진영)를 설치했다. 그는 차가운 바위라도 따뜻해질 때까지 앉아 버틴다는 인내의 달인이었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르는 이른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원조였다. 에도 막부 개설 후 260년 후 팍스 도쿠가와(에도막부에 의한 평화) 시대가 끝나고 미국의 흑선 내항으로 대혼란이 일어났다. 무능한 막부가 우왕좌왕할 때 조슈와 사츠마의 히데요시 잔당이 세력을 키워 왕정복고의 명분으로 에도 막부를 전복시킨다. 이것이 메이지유신이다. 그들은 동북으로 쫓겨간 막부 세력이 언젠가 에도를 탈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천도를 결정했다. 1869년 메이지 천황은 통치근거지를 교토에서 동북지방인 변방 에도로 옮기고 동쪽의 미야코(수도)라는 의미로 도쿄(東京)로 개명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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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조선-서울), 영락제(명-베이징), 메이지 천황(일본-도쿄)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이른바 북방정책을 통해 공산권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했다. 1990년에는 소련과 국교를 맺고 2년 후인 1992년에 중국과 수교했다. 필자는 도쿄대사관의 임기를 끝내고 본부 근무를 거쳐 1995년 봄에 처음으로 베이징대사관에 부임했다.

한중간 수교 이후 양국 간 교류는 다방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한국 기업에 중국은 새로운 프론티어로 부상, 경제면에서는 한중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한때 한중간 교역 규모는 전통적인 한미·한일 간 교역 규모를 합한 것보다 많았다. 아시아 금융위기 등 어려운 국제 여건하에서도 한중 교역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 교류도 증가하여 '대장금' 등 한국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는 등 중국에서의 한류 열풍이 대단했다.

수천 년에 달하는 중국 역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 말이 있다. “오랫동안 분열되면 반드시 통일되고, 통일이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된다(分久必合 合久必分).” 이러한 중국 역사는 한반도 역사도 바꾸었다. 중국의 대세가 내분에 빠졌을 때 한반도는 번영했고 중국에 통일 세력이 나타날 때는 한반도는 침탈의 대상이 되었다. 한중 수교로 전대미문의 한중 양방의 호황으로 대사관 업무가 바쁘기도 했지만, 보람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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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중화민족의 근원지)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은 중국의 중심이라기보다 대륙의 북동쪽에 치우쳐 있다. 베이징도 일본의 도쿄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수도가 되었음을 알게 됐다. 베이징은 기원전 7세기 전국시대 7웅의 하나였던 연의 수도(燕京)이었다. 중국은 진(秦)에 의해 통일되고 연경은 진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남았다. 진시황의 천하는 짧게 끝나고 초나라 항우를 꺾은 유방의 한(漢)은 함양 교외 장안에서 건국했다.

그 후 수, 당, 송 등 중국 통일왕조의 수도는 여전히 중원 쪽이었다. 반면에 북방의 소수 민족이 세운 요, 금 등은 베이징을 중시했지만, 통일 중국의 수도가 된 것은 몽골이 세운 원이 처음이었다. 당시 대도로 불린 베이징은 몽골의 본거지 고비 사막에서 멀지 않은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원을 물리친 나라가 명이다. 아버지 주원장(명 태조)에 의해 연왕으로 봉해진 넷째 아들 주체가 주원장 사후 황제(건문제)가 된 조카의 왕위를 쿠데타로 찬탈했다.

스스로 황제(영락제)가 된 연왕은 1403년 수도를 난징에서 변방이지만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대도(당시 베이핑)로 옮기고 베이징으로 개명함에 따라 베이징은 다시 정치의 중심이 됐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수도로 정한 1394년보다 거의 10년 후였다. 그 후 중국은 왕조가 바뀌고 공화국이 됐지만, 베이징은 오는 날까지 중국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베이징대사관 근무 시절 중국의 명산 화산(華山)에 오른 적이 있다. 화산은 시안과 정저우의 중간쯤에 있는데 해발 2000m 정도의 험준한 화강암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현지 안내인은 화산은 화하(華夏)민족 즉 중화민족의 발상지라고 설명하면서 중국의 건국 신화가 여기서 시작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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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의 비가 있는 베이징의 법원사

 
중국에는 3황 5제 즉 8명의 신화 속의 왕들이 중국 문명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3황은 복희, 신농, 여와를 일컫고 5제는 황제, 전욱, 제곡 그리고 요 및 순이다. 그중 가장 태평스러운 시대를 요·순 시대였다고 한다.

옛날 신화 속의 중국에 엄청난 홍수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순임금이 치수에 실패한 곤을 죽음으로 사죄케 하고 그의 아들 우에게 치수의 중임을 맡겼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치수에 성공, 홍수의 피해를 막았다. 순임금은 우의 능력과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임금의 자리를 선양하였다. 우임금은 중국 최초 하(夏) 왕조의 시조가 된다. 우임금이 도읍으로 정했다는 린펀(臨汾)은 화산에서 멀지 않았다. 우(禹)의 갑골문을 보면 손으로 뱀을 쥔 현상이라는데 당시 뱀을 잡았다는 것은 홍수로 범람한 황허강의 물줄기를 잡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우임금이 세운 하나라의 17대 걸왕이 매희라는 미인에 미쳐 주지육림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이때 동이족의 탕이 걸왕을 축출하고 상(商) 나라를 세웠다. 상나라도 31대 주왕이 달기라는 미인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하자 화하족이 세운 제후국 주(周)나라 무왕에 의해 멸망된다. 왕족 출신의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하고 동이족 백성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장사로 살아갔다. 상업은 상나라 사람들의 직업이었다.

당시 동이(東夷)는 동쪽의 오랑캐가 아니라 동쪽에서 온 예절 바른 민족이었다고 한다. 동이를 오랑캐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통일한 진(秦) 이후 통일 중국의 영토 밖의 동쪽에 사는 이민족을 일컬었다. 옛 문헌에 기록된 동이라도 모두 같은 민족이 아니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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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려(고마)신사

 
베이징에 민충사(지금은 법원사)라는 천년 사찰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7세기 후반 고구려 원정(안시성 전투)에 패배, 도망쳐온 당 태종이 전쟁에서 희생된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안내자가 사찰 경내 보존된 당 태종의 고구려 정복 전쟁과 이 절을 세운 경위가 기록되어 있는 비석을 소개했다.

비문을 읽어 본 필자는 깜짝 놀랐다. 비문에는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을 “고려정벌(征高麗)”로 쓰여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려하면 10세기 왕건이 세운 나라로 생각했는데 중국에서는 고려 건국 수 백년전부터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학자에게 물어보니 <구당서> 등 수많은 역사서에 고구려가 아니고 고려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베이징 교외 ‘고려영’이라는 지명도 고구려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려영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이 이주해 집단 거주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는 중국에서 이주한 고려인이 많이 거주한다.

당나라의 영토를 파미르 고원 넘어 서역으로 확장시킨 고선지 장군도 중국 역사서에는 고려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선지 장군은 서역으로 진출하려는 아랍 왕국을 막기 위해 탈라스 전투를 치렀다. 8세기에 고선지 장군의 명성과 함께 고려 즉 코리아(Corea, Korea)라는 나라 이름이 아랍인을 통해 서양에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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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사의 정문을 지키는 고려견 한쌍

 
도쿄대사관 근무 시 인근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려신사(高麗神社)를 가본 적이 있다. 현지인은 고려라는 말 대신 ‘고마’라는 말을 썼다. 고마 신사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진 약광(若光)을 모신 신사라고 한다. 지금의 궁사(宮司, 신사의 책임자)는 약광의 후손이다. 일본국에 사신으로 왔던 약광 일행이 조국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됐다는 소식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의 배려로 현지에 눌러살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고마 신사에는 사자와 비슷한 모습의 석조 조형물이 놓여 있는데 고마(고려) 이누(高麗犬)라고 부른다. 고구려가 멸망된 후 고구려 유민이 데리고 온 개로 삽살개와 모습이 유사하다.

후에 알았지만, 국내에도 자료가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이 세웠다는 충주 고구려비를 보면 장수왕이 자신을 ‘고려태왕’으로 밝히고 있다. 한중일의 금석문이나 당시의 기록을 보면 5세기 장수왕 이후 고구려를 고려라고 개칭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고구려 멸망 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자신의 나라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우정 고구려라고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필자는 베세토 근무를 통해 알게 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를 한반도에 가두어 보면 제대로 안 보이고 한중일로 넓혀보아야 보인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한중일 젊은 세대가 베세토 여행을 통해 교류한다면 베세토 협력도 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될 것 같다. 올바른 역사 인식은 서로의 정체성을 찾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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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필자는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특별히 애송하는 시가 있다. <청포도> 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의 <광야>라는 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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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와 이육사 독립운동가

 
이 시를 좋아하는 것은 시의 스케일이 시간적으로 무한하고 공간적으로 광막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연상시켜서이다. 또한 이육사가 일제에 붙잡혀 고문으로 최후를 맞이한 베이징의 옛 일본 총영사관(베이징시 동성구 동창후통 소재)이 필자가 베이징 근무 시 살았던 아파트에서 멀지 않았던 인연도 있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명분으로 동양의 평화유지와 한국 독립의 공고화를 내걸었다. 일본은 한국(대한제국) 등의 협력을 얻어 전쟁에서 승리했다. 승리한 일본은 당초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일본의 배신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루부미 암살 의거가 일어나게 했고 이육사 같은 꿈을 좇는 시인을 독립운동에 내몰았다.

<광야>에는 일제 하의 엄혹한 상황에도 독립의 씨를 뿌리면 언젠가 조국의 주권이 회복되고 동양평화가 이루어질 때 후손들이 기쁜 노래를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는 이육사 시인의 염원이 들어있다. 이제 군국 일본은 패망했고 한국은 독립하여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한중일 3국이 베세토 정신으로 교류협력의 씨를 뿌려두어야 안중근 의사가 구상했던 동양평화가 유지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글쓴이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한중투자교역협회 자문대사 역임
한일협력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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