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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칼럼] 여순은 반란이다(1-8)

이국영 기자 | 기사입력 2024/10/09 [09:51]

[정재학 칼럼] 여순은 반란이다(1-8)

이국영 기자 | 입력 : 2024/10/09 [09:51]

여순은 반란이다(1-8)

 

 

본문이미지

 

                                                 정재학 ( 시인 . 칼럼니스트 )

 

◈ 들어가는 말

 

1948년 10월 19제주도 폭동 진압 파견을 거부하고여수순천 지역 좌익들과 합세하여 일으킨 제14연대의 반국가 행위는 자유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여기지 않는 자들의 반란(叛亂)’이다그러나 민주당 좌익들은 이를 항쟁(抗爭)’이라 표현한다.

 

반란과 항쟁은 다른 말이다반란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나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규모의 집단적 행동을 뜻하고항쟁은 적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뜻이다그러므로 여순항쟁이라는 말은 여수와 순천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적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뜻이 된다어떻게 명칭을 붙이든 반역임에 틀림없는 사건이다.

 

또한 여순반란사건은 국군 제14연대만의 반란이 아니었다그들은 반란을 군대만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었다반란군은 여수 지역 남로당 출신 좌익들과 합세하여 여수 순천 등 호남 동부지역 전체로 확산시켰다그리고 여순반란사건 첫날 20일 여수를 점령한 뒤첫날만 무려 400여 명에 이르는 경찰 및 그 가족들과 우익인사들을 죽였다이뿐만이 아니다완전 진압까지 약 6개월에 걸친 반란 동안 자행한 반동분자 숙청’ 결과엄청난 수의 양민 학살(虐殺)과 군경(軍警)과 그 가족들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이 처참한 살해를 저지른 좌익들의 죄상을 묻어두고국군의 토벌(討伐시 발생한 양민 희생의 죄과(罪過)만을 물을 수는 없다폭행사건을 다루는 형사소송법도 누가 먼저 때렸는가를 죄의 우선순위로 따지는 법이다또한 지창수 상사는 반란 선동 연설에서인민군의 남침을 말하면서 인민군과 호응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뒤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인민 행정(行政)을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여순반란사건은 남로당의 지휘 하에 대한민국을 전복(顚覆)시키고 인민공화국을 만들기 위하여여수와 순천 지역 인근의 좌익들이 지창수 이하 반란군과 합세하여 벌인 총체적인 반란이다.

 

혹자는 미군의 개입을 말하고 있으나당시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공포하였고이미 미24군은 일본에서 해체 중이었으며한국에 있는 미군3개 사단은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간혹 여순반란사건에 미군이 실린 사진 속의 미군들은 실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군사고문관들이었다미군은 어느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9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순천역에는 여순반란사건을 여순사건으로숱한 인명(人命)을 살상하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던 자들을 봉기군으로 표현한더 나아가 이들의 반란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여순반란사건을 기념하는 안내판이 서있었다.

 

김대중․노무현 좌익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의 근현대사는 좌파적 시각으로 판단되고 재평가되고 있었다그 중 북한과 관련된 대부분이 좌파들에 의해 조작 날조되었다특히 6. 25의 경우엔 북한의 침략 자체를 부정하고전쟁 당시 일어난 학살은 모두 국군과 미군의 범죄로 몰아붙이고 있었다완벽하게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는 좌익들에 의해 조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같은 경우여순반란사건의 주범인 지창수 상사김지회 중위 이하 반란군과 지리산에 입산한 빨치산에 대해선 활동의 과정과 애증어린 흔적만 제시할 뿐조정래는 빨치산들이 저지른 수많은 극악무도(極惡無道)한 학살(虐殺)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빨치산 활동의 잔악한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고빨치산에 대한 동정심만을 품게 되어 있었다.

 

필자는 10여년 전 빨치산루트를 찾아가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의 비밀아지트를 보게 되었다그 비트엔 인쇄잉크나 펜 같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그러나 얼마 후 그 유품들은 누군가에 의해 깨끗이 수습된 사진을 보게 되었다바로 전교조 교사들에 의해 학생들이 빨치산추모제에 참가하고 있었던 때의 일이었다.

 

빨치산 추모만이 아니었다지난 10여 년 동안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통일열사로 추모하는 일까지나라와 민족의 전통적 가치관과 자유민주의 근간을 흔드는 좌익들의 책동이 범람하고 있었다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자체를 부정하는 진보당과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현재 존재하고 있다.

 

지금도 북의 인민공화국을 조국으로 인식하는 자들은 탈북단체의 애국적 행동을 매국(賣國)’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6.25 당시 벌어진 좌익빨치산들의 파업과 반란 행위를 애국운동으로 표현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대표적인 예가 여순반란사건을 여순 봉기로 말하고 있는현재 여수순천 인근의 좌익 시민단체 사람들이다그리고 반란군들을 봉기군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반란의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자 한다많은 분들의 자료를 참고한 바 있으니그분들도 필자의 뜻을 알고 허락없이 사용하였음을 해량하여 주시리라 믿는다.

 

1. 반란의 시작

 

당시 남로당에서는 군 장교에 대한 침투공작은 주로 사관학교 내에 이미 침투하였거나 포섭된 조직망을 통해서 남로당이 추천한 자를 무조건 입교시키는 경우와 이미 임관된 장교로 지인(知人), 동창(同窓), 혈연(血緣), 지연(地緣)등의 인간관계를 이용하여 포섭하였다.


14연대의 경우남로당 전남도당위원회는 도당부(道黨部)에 군사부(軍事部)를 설치하고 군()과 야산대(野山隊공작을 담당하고 있었다도당군사부에서 광주(光州), 목포(木浦)를 비롯한 각 시.군당 군사부에 사병추천 지시를 하달하면 이들은 면리까지 다시 지시를 하여 입대자 명단을 받아 도당 군사부에 제출하였다도당에서는 이 명단을 제14연대 공작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조직책(일명오르그박태남(朴泰南)에게 주고()은 제14연대 연대조직책인 연대인사계 지창수 상사에게 지시하여 대대중대소대로 배치한했후일 반란군 사령관 김지회도 함흥 출신으로 이때 침투된 좌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대 인사계에 대한 침투 및 포섭공작이 무엇보다 선행(先行)되었고14연대의 경우 약 절반의 사병이 전남도당에 의해서 침투되었다고 한다.

 

김지회 중위는 이북 함남출신으로 함흥농고를 졸업한 후 월남하여 1947년 육사 3기로 졸업했고, 1948년 6월 1일자로 14연대에 전속된 자였다그는 당시 남로당 중앙당에서 관리하는 조직원인 연대장 오동기 중령의 신임이 두터운 장교였다.

 

1948년 5월 4일 여수에 제14연대가 창설되자 제1대대장 이영준 소령이 연대장으로 보임되면서 안영길 대위 이하 1개 대대병력이 제14연대로 전출되었다14연대 기간요원 중 하사관 출신 50여 명이 14연대 근간이 되었다국방부가 지목한 여순사건의 주동자 지창수 상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고 그 역시 광주 제4연대 모병 때 입대한 자였다.

 

14연대를 창설할 때4연대 대원중 평소에 까다로운 행동을 하거나 사상이 의심스러운 구성원들 대부분이 제14연대의 창설요원이 되었던 것이다그래서 제14연대의 창설요원으로 뽑힌 800여명의 병사들은 차출케이스로 뽑혔다는 사실만으로도 동료의식을 느끼고 있었고사상적으로도 연대의식과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 14연대 병영위치는 여수시에서 4km 떨어진 구 일본군 항공기지에 자리하였다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농민들의 논밭과 마을을 강제로 징발하여 사용하고 있던 곳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연대장은 제4연대 연대장으로 있던 일본군 출신 박승훈(일본육사 제26기 출신)중령으로여순사건이 일어나기 12일 전인 10월 7일자로 제14연대장으로 부임했다.

 

 

2. 반란의 그날

 

1948년 1011일 제주도 4.3폭동이 악화되자육본에서는 제주도에 진압 사령부를 신설하고대구 6연대 1개 대대부산 5연대 1개 대대를 증파하였다그리고 1015일 여수 14연대장에게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를 조속히 편성하여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사령부는 여수 14연대 1개 대대를 10월 20일까지 제주도에 도착시켜 작전에 임하라는 진압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14연대장은 즉시 1대대에 출동준비를 지시하고일본군이 쓰던 88식이나 99식 소총을 반납케하고 M1소총을 지급하였다이 소식은 즉시 14연대 남로당 책임자 지창수 상사를 통해여수 인민위원장에게여수인민위원장은 전남도당 책임자 김백동에게 보고하였고김백동은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이재복은 즉시 출동을 저지하라고 지시하였다이에 지창수 상사는 10월 16일 즉시 정락현유창남김근배김정길 들을 만나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이 내용을 부대 안의 식당에서 일하는 연락책 박태남에게 알려 주었다박태남은 즉각 여수 인민위원장에게 보고하였다.

 

이 사정을 모르는 육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14연대장에게 보냈다.

“14연대 1개 대대는 10월 19일 20시에 여수항을 출발 제주도에 도착하라육군참모총장 이응준 대령

 

그러나 이 전보는 14연대장 박승훈이 보기 전에 우체국에서 일하는 남로당원에 의해 여수 인민위원장이 먼저 알게 되었다곧 인민위원장은 여수 지역의 남로당원을 동원하였고김백동과 이재복도 계속 지령을 내렸다이에 지창수 상사 등은 부대 내에서 반란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지창수는 부대 안의 남로당원 40명을 즉시 소집하여 제주도 출발을 위해 연병장에 모일 때 부대를 장악하기로 하였다그리고 이 계획을 식당에 있는 박태남을 시켜 여수 인민위원장에게 보고하게 했다여수 인민위원장은 여수 남로당원을 동원하여 부대 앞 식품점 근처에서 모여 있을 테니식품점 주인에게 물건을 사는 척하면서 반란이 성공하면 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신호가 개는 잘 짖고 있다였다인민위원장은 즉시 부대에 들어가서 합세하겠다고 하면서 암호는 처녀”, “총각이라고 알려 주었다.

 

1948년 10월 19일 작전명령을 접수한 14연대 박승훈 연대장은 만약을 염려하여 남로당에서 이 정보를 입수하여 저지할지 모르니, 19일 20시 출발을 21시로 연장해서 출발하라고 지시하였다군장 검열은 2시부터 식사는 오후 6부대 출발은 오후 9시에 하기로 하였다부대는 60밀리 박격포로 무장시켰다. 1대대장 김일령 대위는 출동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오후 7시 식사를 마친 연대장과 참모들은 여수항 군함에 군수물자를 선적하느라 부대를 출발여수항에 도착하여 선적을 감독하고 있었다.

 

오후 8시 집합 나팔이 울렸다, 1대대 장병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완전 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모였다모든 전화선이 끊겼다남로당원인 40여명의 장병들이 서서히 1대대 장병들을 포위하였고일부는 탄약고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일부는 정문을 출입 통제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여수 남로당원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부대 앞 식품점에 모여 들었다.

 

19일 오후 8시 지창수 상사가 연단에 올라가 인원보고를 받고 있었다. 1중대 – 2중대 – 3중대 중화기 중대 순으로 집합하여 보고를 하고 있었다장병들의 실탄은 연병장에서 지급하기로 해서 실탄이 없었으나반란자들에게는 사전(事前)에 2크립씩 실탄이 지급되어 있었다.

 

원래는 김일령 대대장이 집합 보고를 받고 훈시를 하고 출발명령을 해야 하는데장교들은 9시에 집합한다고 해서 연병장에 나와 있는 장교가 한 사람도 없었다이를 의심하는 장병은 전혀 없었다.

 

이윽고 지창수 상사가 사열대에 올라가 선동을 시작하였다.

 

지금 밖에는 경찰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이 때문에 비상소집을 한 것이다즉시 응전할 준비를 갖추어 경찰을 타도해야 한다지금부터 경찰은 우리들의 적이다총을 들고 저주스런 경찰을 타도하자우리들은 동족이 상쟁하는 제주도로 출동하는 것을 절대 반대 한다경찰을 타도하게 되면 우리들은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위하여 궐기(蹶起)한다.

실은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진격 중이다우리들도 여기에 호응 북진하여 미국의 괴뢰를 소멸시켜야 한다지금부터 우리들은 인민해방군이 된다그래서 조국통일을 볼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연설을 마치자좌익들이 옳소!”하며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탄약고에서는 탄약고를 점령하였다는 신호탄이 올랐다이때 하사관 2명과 사병 1명이

 

안 된다우리가 어떻게 해방군이 된단 말인가경찰은 타도하고 제주도는 안 간다 해도 해방군은 안 된다!”

 

그러나 좌익하사관들이 이 세 명을 끌어내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였다.

 

우익 장병들이 이에 대항하려고 하였지만 좌익들은 실탄을 갖고 있는데실탄이 없어 대항할 수 없었다결국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모두 지창수와 함께 반란군이 되었다.

 

탄약고를 점령한 반란군은 신속하게 실탄을 운반하여 1대대 장병들에게 실탄을 공급하였다반란에 소요된 시간은 불과 10분이었다그리고 지창수는 의무장교만 빼고장교는 모두 사살하라고 명령하였다.

 

5중대 주번사관 박윤빈 소위(육사6)는 9시에 비상나팔을 불어야 하는데, 8시에 불리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연병장으로 가는데 누구냐?”하는 수하(誰何)를 당하였다. “나 주번사관이다무슨 일이 있는가?” 하자 반란군은 박윤빈 소위를 확인하고 총을 쏘았다.

 

박윤빈 소위가 쓰러지고, 1중대 주번사관 김정덕 소위도 똑같이 반란군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구병모 소위는 반란군의 총격으로 창자가 밖으로 쏟아졌다그러나 박윤빈 소위는 극적으로 생명을 건졌다.

 

이를 알아챈 전용인 소위(육사5)가 1대대장 김일령 대위에게 출동부대가 반란군이 되었다고 보고하니김일령 대위는 전용인 소위에게 여수항에 있는 연대장에게 빨리 가서 보고 하라여기는 내가 수습하겠다고 명령하고 권총을 빼들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반란군 20여 명은 2대대와 3대대 중대장실을 다니며 장교는 무조건 사살하고, 1대대장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이에 너희들 누구냐?”하며 대대장 김일령이 일어서며 외쳤다그러자 반란군들은 총을 난사하여 죽였다.

 

총소리에 놀란 2대대와 3대대 장병들이 내무반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자반란군들이 막사를 점령하였다그리고는

경찰이 부대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빨리 탄약고에 가서 실탄을 가지고 집합하라!”

고 명령하자, 2대대와 3대대 장병들은 영문도 모르고 실탄을 지급받아 연병장에 모여 반란군이 되었다여기에 반항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하고 장교들을 죽이니 장병들은 영문도 모르고지휘할 장교들도 없어 겁에 질려 모두 반란군이 되고 말았다.

 

반란군은 1대대장 김일령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연대 작전주임 간성윤 대위, 1중대장 차지영 소위, 2중대장 김용관 중위진도영 중위 외 3(육사3김록영 중위 외 7(육사5), 이병순 소위 외 6(육사6이상 우익 장교 20여 명을 죽이고, 2대대와 3대대까지 반란군으로 만들어 14연대 2,300여 명이 완전히 반란연대가 되었다하사관과 사병도 총 40여 명이 살해되었다.

 

한편 14연대 정문 앞 식품점에서 반란이 성공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여수 남로당원 23명은 개는 잘 짖고 있습니다.”하는 연락을 받고, ‘인민공화국 만세!’ 를 부르며 부대 안으로 들어가 무장하고 반란군과 합세하였다그 수가 약 2,200명이었다.

 

소결론 좌파들은 이상과 같은 14연대 반란을 여순 봉기라고 주장하고 있다과거 순천 역사(驛舍앞에 안내판을 세운 자들은 분명 지창수김지회 등과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다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다섯명이 여수와 순천을 찾아가 반란이 아니라 항쟁이라고 고칠 것을 강요한 일도 있다이런 자들이 우리와 더불어 자유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국가는 이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여야 하고이러한 좌익들은 모두 대한민국 국적(國籍)을 박탈해야 한다.

 

 

3. 반란의 진행

반란군 여수 점령과 학살-

 

지창수가 반란에 완전히 성공한 시간은 20일 새벽 1시로 약 5시간이 걸렸다반란 소식을 듣고고인수 여수경찰서장은 200여 명으로 방어 준비를 하였다그러나 반란군은 여수경찰서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20일 오전 9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세상을 만들고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걸었다여수시 남로 당원 600여 명은 무장을 하고 여수시를 이 잡듯이 뒤져 경찰과 우익을 찾아 21일까지 400여 명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반란군들의 순천 학살 당시, ‘울밑에선 봉선화를 부르고 숨진 한 성악가의 최후가 상징적으로 남는다조정래는 그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바로 이 장면을 그린다조정래는 덤덤하게 이 장면을 그렸으나이것은 반란군의 학살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당시 이 반란군에 가담한 학생들이다철없는 어린 남녀 중학교 학생들이 반란군에 가담한 것은 당시 학교에 침투해있던 좌익교사들에 의해 세뇌된 학생들이었다고 한다특히 여수중학교는 교장부터 좌익이었다이름이 송욱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순천중학교 역시 다수의 학생들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다이는 좌익들의 군중선동에 의한 결과였지만혁명에 대한 막연한 동경(憧憬)과 순천 여수 지역을 휩싸던 군중심리에 의해 휩쓸린 결과였다이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 좌익이념은 유행 같은 것이었습니다혁명과 투쟁이란모험과 영웅을 꿈꾸는 젊은 피를 자극하기에 얼마나 좋은 소재입니까뭔가 멋있어 보이는 공산혁명이라는 극악한 독물(毒物)을 우리는 동경하였던 것이지요그리고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일 진압군이 순천과 여수로 진격할 때골목길에 숨어있던 여학생들이 국군을 유인하여 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그 철없는 여학생들사람을 죽인다는그것도 동포를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몰랐던 여학생들이었다그리고 그런 죄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을 가르치지 않고어린 것들을 이용하여 그런 무서운 일을 저지르게 한 자들이 바로 빨갱이라 불리우는 좌익들이었다.

 

그리고 더 가증스러운 것은 당시 반란군들이 지리산으로 후퇴할 때이 어린 것들을 엄호세력으로 이용하였다는 점이다모두가 도망친 여수 순천 시내에 남아서 국군에게 총을 쏘던 학생들은 반란군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그리고 죽어갔다.

 

순박해 보이는 여학생들도 국군에게 총을 쏘아대는 마당에서 토벌이 평화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당시 좌익들은 여수 순천에서 엄청난 숫자의 우익인사들을 학살하였다그런데도 그 빨치산 학살은 묻어두고학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국군과 경찰에 집중시키고 있었다반란군 진압과정반란군 토벌과정에서 발생한 빨치산 부역자 처형을 양민 학살로 둔갑시키고모든 죄를 경찰과 국군의 범죄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다음은 여수 순천지역 학살에 관한 기록이다이 기록에 대한 신뢰를 의심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에 그 출처를 밝힌다.

 

이날 17:00경 반란군은 순천의 전 시가지를 완전 점령하고 좌익분자들과 중고등학생을 선동하여 무장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반동분자를 색출하게 하여 500여 명을 인민재판 아래 학살하였다.


특히 순천지역 일대에서는 경찰관 400여명이 반란군 진압작전을 펼치던 중에 전사하거나 반란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렇게 반란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게 되자 민심은 동요되고소박한 주민들은 실제로 공산정권이 출현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으며반란군의 선동과 강압으로 이들에게 가담하는 자가 속출하여 무장폭도들의 수는 수천 명에 달하였다.

순천에서 세력을 확장한 반란군은 3개 부대로 재편성하여 1천여 명으로 편성된 주력은 북쪽의 학구(鶴口구례 방면으로, 1개 부대는 동쪽의 광양(光陽)방면으로, 1개 부대는 서남쪽의 벌교(筏橋), 보성방면으로 분진(分進)하면서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였다.

한편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반란군의 일부는 지방 좌익세력과 합류인공기를 게양하고 순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인민행정(人民行政)을 개시하였다그들은 모든 우익인사들을 즉석에서 살해하거나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400여명을 처단하였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한국전쟁사(구판 1), 1967, p 458)

한편 여수에 "인민공화국"을 만든 좌익세력은 20일 15:00시경 인민대회(人民大會)를 중앙동광장에서 열고 약 4만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용기(李容起)를 비롯한 5명의 의장이 대회를 진행하였다이 대회에서 좌익단체인 노동조합대표농민조합대표여성동맹대표청년대표의 "인민공화국 수호"를 외치는 연설이 있었고 5개 항목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김남식위의책, p 452)

ㅇ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ㅇ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ㅇ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ㅇ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ㅇ 친일파민족반역자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이러한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한 인민대회는 막을 내리고 인민대회에 모였던 시민들은 곧이어 군중시위에 들어갔다좌익 군중들은 여수 군청을 비롯한 각 기관들을 접수함으로써 하루 만에 여수시내는 좌익세력에 의한 인공치하(人共治下)가 되고 말았다.

한편 비합적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민애청(民愛靑)", "민주여성동맹(民主女性同盟)", "합동노조(合同勞組)""교원노조(敎員勞組)", "철도노조(鐵道勞組)" 등이 나타나 제각기 간판을 내걸었다그 이튿날(10.21) 여수시내 좌익분자들은 한독당(韓獨黨)을 제외한 한민당(韓民黨), 독립촉성국민회대동청년단민족청년단서북청년회 등의 간부와 단원들을 반역자로 적발체포하였으며 이들은 이날 인민재판을 개최하고 제일먼저 여수경찰서장 고인수(高寅洙)를 비롯한 사찰계 직원 10여명을 처형한 것을 필두로 수십 명을 숙청하였다.

특히 이들은 여수경찰서 소속의 여순경 2명을 붙잡아 대낮에 발가벗긴 채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부분에 총을 쏘아 죽이고한명은 총알이 아깝다면서 죽창으로 국부를 찔러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엔터프라이즈, 1988년 5월호그리고 그들은 "여수일보"를 접수하고 "여수인민보"라는 좌익신문을 발간하였다.

이들의 우익세력에 대한 인민재판은 계속되어 처형된 수가 첫날만 4백여 명을 넘었다여수 지역 통틀어 반란군에 희생당한 사람은 모두 1200여 명이었다.

 

4. 반란의 심화

이현상의 등장과 반란군 순천 점령 -

 

10월 20일 오전9시 반란군은 여수역 광장에 모였다이때 남로당 중앙당 연락부장 이현상(후일 남부군 지도자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짐이 될 것을 두려워 한 북한의 지령으로 등에 총을 맞고 사살됨)의 지령으로 김지회 중위가 반란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반란군을 지휘하던 지창수는 1개 대대로 여수에 남아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김지회는 중앙당으로부터 순천을 점령하고 학구와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북상하라는 지령을 받았다반란군 2개 대대는 열차를 타고 20일 아침9시 30분 순천을 향해 출발하였다이들이 탄 열차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순천은 남로당 출신 좌익 홍순석 중위가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어 순천 점령은 시간문제였다.

 

10월 20일 여수에서, 14연대 반란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입수한 양계원 순천 경찰서장은 경찰을 동원하여 삼거리에서 반란군을 저지하게 하였다전 경찰을 순천역 동쪽 봉화산 밑에서 14연대 병력이 기차에서 내릴 때 공격하게 하고호를 깊이 파게 지시하였다. 10시 경찰배치가 끝나자 순천 시내 여러 곳에서 총성이 요란하였다.

  

10시 30분 순천에 온 반란군에 의해 삼거리 경찰은 순식간에 돌파되었고, 10여 명의 경찰은 현장에서 즉사하였다반란군이 순천역 동쪽 고지를 향해 바람처럼 진격하자 이것을 본 경찰은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도망쳤다급보를 받고 광주 4연대 2대대 1중대를 순천에 급파하였는데, 1중대 좌익들이 또 중대장과 우익을 죽이고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반란군과 진압군은 서로 구분하기 위하여 진압군은 철모에 흰 띠를 둘렀는데 이제는 반란군도 흰 띠진압군도 흰 띠여서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혼란이 가중되었다순천에 파견된 홍순석에게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지만 홍순석은 남로당원이었고그에 의해 이미 2개 중대가 반란군에 합세한 상태였다.

 

10월 20일 오후 3시경 반란군은 순천을 완전히 점령하여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올렸다. 이어 남로당원들은 우익과 경찰들을 잡아죽이기 시작하는 한편반란군은 순천중학교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참모들과 대대장 중대장들을 더욱 보강하여 조직을 튼튼히 하고 순천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10월 20일 오후 3시 순천중학교에 있는 반란군 연대본부에서 김지회 사령관은 1대대는 순천을 방어하게 하고 2대대는 벌교학구와 광양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하였다이에 홍순석중위가

 

부대를 분산하면 각개격파 당하므로 순천은 입구만 봉쇄하면 여수까지 자연 봉쇄되어서 여수와 순천을 해방구로 만들어 철저히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몇 년이고 버티는 작전과아니면 즉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대가 되어 장기전을 해야 합니다이유는곧 광주의 4연대군산의 12연대전주 3연대대전 2연대마산 15연대가 올 것인데 벌교학구광양을 공격하여 부대를 분산하면 절대 우리는 각개격파 당하고 북진해서 서울도 가지 못하고 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고 김지회의 작전을 반대하였다.

 

만일 김지회가 홍순석의 작전대로 순천 입구의 고지를 점령하고 철통같이 방어전을 한다면 국군이 방어진지를 뚫기는 어려웠을 것이다당시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공포하였고이미 미24군은 일본에서 해체 중이었으며한국에 있는 미군 3개 사단은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따라서 미군의 전차를 동원하지 않고는 공군도 해군도 여수 순천을 탈환하기는 어려웠다.

  

김지회가 홍순석의 작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지만김지회는 중앙당에서 학구를 거쳐 남원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그리고 당에서는 광주 4연대 일부군산12연대전주 3연대마산15연대 내의 남로당원 등에게 반란을 일으켜 이들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라는 명령이어서 내일이 최대 고비라고 설명하였다결국 2개 대대는 별교학구광양을 점령하기 위해 순천을 출발하였다.

 

이때 남로당 연락부장 이현상은 순천에 도착하여 작전을 지도하고 있었다.

 

좌익 반란군이 저지른 학살 및 피해 상황

피해 내용

여수

순천

()

학살당한 경찰 및 우익 인사와 그 가족

1,200

1,143

2,343

부상자

1,150

모름

1,150

가옥 피해

154

18

172

행방불명자

3,500

818

4318

국군피해

장교 21하사관 및 사병 42

 

반면반란군은 모두 392명이 사살되었고포로는 1,512명이었다.

 

5부 반란의 진압

- 백인엽의 반격 -

 

<반란군 투항 권고 전단지>

 

사람이여 보라.

 

이치없는 주장과 불가능한 목적아래 희망없이 단말마적인 농산(籠山)을 계속하고 있는 산 사람 여러분!

 

군들이 그와 같이 굶고 헐벗고 산야를 헤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족을 위함인가? 가족을 위함인가? 또는 자손을 위함인가? 민족을 위한다면 동족 상잔이 무슨 말이며, 가족을 위한다면 헐벗고 굶주리며 살고 있는 그대의 가족들은 어찌 된 일인가?

 

이가 자손을 위함이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대들의 그릇된 사상과 행동으로 인한 일거수 일투족이 우리 민국을 해()하며 민족을 상()하고 국민을 도탄에 빠뜨린다는 것은 잘 알 것이다.

 

그러타면 그대들의 사상과 목적이란 근본부터 전복되는 것이 아닌가. 그대들이여 뉘우쳐라.

 

우리민족은 4천년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싸워야 하며 서로 죽여야 하겠는가?

 

서로 서로가 우리 3천리 강토에서 새로 전 세계의 승인을 받은 당당한 대한민국을 받들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타민족 타국가에 지지않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지 않으려는가?

 

그대들이여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번은 과오가 있는 것이고, 잘못을 생각할 때 결연히 그 과오를 청산함에는 절대적인 용기가 필요하며 그는 우리도 잘안다.

 

군들이여 군들의 압길을 생각하여 보라.

 

날은 점점 추워질 것이며 식량, 탄약 역시 결핍하여질 것이고, 그 위에 정예한 우리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도 근일 중에 있을 것이라. 그러면 군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인가? 아니다. 단 한가지 살길이 있다.그것은 즉 이번 대통령명령으로 또는 전투사령부에서 선명하신 1월말일까지 무기 지참자는 이유불문하고 즉시 석방함.

 

무기불지참자도 우(오른쪽)00하라는 관대하신 은전000. 산에 있는 그대들이여. 이것이 0000이니 돌연 과오를 청산하고 하루 속히 근방에 있는 지서나 대한청년단으로 귀순하라. 그러면 그대들의 가족의 안전은 물론 그대들도 무조건 석방할 것이다.

 

이를 믿지 못하는 자여. 대통령께서나 사령관께서 공적으로 천명한 것을 이행하지 않을 이유가 어데 있는가?

 

잘못을 뉘우쳐라. 결연한 결심을 가지고 이 관대한 은전을 굳게 믿고 하루 속히 나오라.

 

우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두손 들고 맞으리라.

 

(위와 같은 내용으로 국군은 반란군에게 투항 권고문을 전단지로 만들어 뿌렸다.)

 

 

-백인엽의 반격-

 

19481020, 이성가 4연대장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에게 1개 대대를 지휘하여 순천 북방 10km 지점 학구에서 반란군이 구례, 남원으로 가는 것을 저지하라고 명령하였다. 박기병 부연대장은 정신없이 군장을 준비하고 1개 대대를 지휘하여 학구에 도착하였다. 그는 광주에서 학구까지 오는 도중 누가 좌익사상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킬지 몰라 불안하였는데 무사히 학구에 도착하여 다행으로 생각하였디.

 

그런데 4연대 장병들이 싸우려 하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육본에서도 급보를 받고 깜짝 놀라 참모총장 채병덕 준장, 작전참모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이 비행기로 광주에 도착하여 보고를 받고 14연대 반란군 진압사령부를 신설하여 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고 참모장에 백선엽 중령, 작전참모에 김점곤을 임명하였다.

 

광주 4연대 1개 대대가 학구에 도착하였고, 군산의 12연대 2개 대대는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이, 전주 3연대 1개 대대는 부연대장 송석하 소령이 지휘하여 진압사령부에 배속되었고, 5연대 1개 대대, 15연대 1개 대대 합 5개 대대로 진압에 나섰다.

 

진압군 사령부는 12연대, 3연대, 4연대를 주력으로 학구에서 반란군 북상을 저지하고, 광양을 15연대, 보성과 벌교는 4연대 일부를 조공(助攻)으로 진압명령을 내렸다. 순천을 3개 방향에서 공격 진압할 계획이었다.

 

광주 4연대 1대대 2개 중대를 오덕준 중령이 인솔하여 보성을 점령한 반란군을 진압하러 군 트럭5대에 분승하여 보성 위 4킬로 지점에 도착하였을 때 반란군이 매복하고 있다가 집중공격을 하였다. 최훈섭 대대장이 장병들에게 하차하여 포위망을 뚫으라고 명령하여 겨우 포위망을 뚫었으나 보성 진압에는 실패하였다.

 

마산의 15연대는 어제 진주를 거쳐 하동에서 잠을 자고 아침 6시 최남근 연대장은 광양에 있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15연대 최남근 연대장은 좌익 장교로서 그는 김일성의 직계였다.

 

15연대는 3중대가 첨병중대가 되고, 2중대 1중대 순으로 행군을 하였다. 반란군들은 15연대가 진압 차 광양으로 오는 것을 알고 광양 동쪽 8킬로 지점 옥고면 산중턱에서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15연대가 사정권에 들어오자 집중사격을 하였다. 첨병중대장 손 중위(육사 5)가 차에서 뛰어내려 부대를 지휘할 때 몸이 노출되어 반란군의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조시형 소위(육사 5)2개 중대를 지휘하여 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하고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장병들과 같이 뛰었다. 대대장 한진영 대위(육사 2)도 같이 뛰었다. 고지를 향해 뛰어가는데 한 군인이 국군이 어느 부대입니까?”하고 물어왔다. 한진영 대대장은 의심도 않고 15연대 1대대장이다.”하자, 그 군인이 한 대대장에게 총질을 하여 한 대대장도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그 군인은 반란군이었다.

 

이 광경을 본 3중대 장병들은 싸우려하지 않고 슬금슬금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반란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광경을 보고 15연대장은 전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런데 3중대가 타고 온 트럭 세 대가 도로상에 그대로 있었다. 최남근 연대장은 조시영 소위와 같이 그 트럭 세 대를 끌어 오려고 차량 가까이 가서 보니 차량 주위에는 온통 반란군뿐이었다. 이것을 알고 조시영 소위가 연대장에게 눈치를 보내어 빨리 가자고 할 때 장병 한 명이 총구를 두 사람 가슴에 겨누었다. 결국 최남근 연대장과 조시영 소위는 포로가 되어 화엄사와 피아골 사이의 문수골로 끌려갔다.

 

▲ 반란군 시체

 

4연대 박기병 부연대장은 아침 일찍 순천을 향해 공격하던 중 학구 근방에서 반란군의 저항을 받고 진격하지 못하고 고지를 점령하고 대치 상태였다. 특히 4연대 장병들은 남로당 세포원들의 선동으로 “14연대 장병들은 우리와 함께 지내던 전우였는데, 어떻게 총질을 하느냐?”

며 싸우려 하지 않았으니, 박기령 소령은 고민이었다.

 

그런데 반란군 편에서 먼저 공격해오자 4연대 장병들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중 1개 중대를 포로로 잡았다. 반란군이 치열하게 공격해 오자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때 12연대 2개 대대를 이끌고 부연대장인 백인엽 소령이 도착하였다. 백인엽 소령은 부대를 출발하면서 반란군 빨갱이와 싸우기 싫은 사람은 안 가도 된다. 싸울 사람만 나서라라고 독려하였다. 이에 장병들은 모두 싸우겠다고 따라왔다.

 

백인엽 소령은 현장에 도착하여 이성가 4연대장으로부터 현재의 상황을 설명을 듣고 즉시 12연대 2대대장 김희준 대위에게 반란군 후방을, 3대대장 이우성 대위에게는 정면에서 공격하도록 명령하고 백인엽 소령 본인은 3대대를 지휘하였다.

 

4연대와 12연대 장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자, 반란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들었다. 그리하여 반란군 일부는 순천으로 도망치는 척하면서 광양으로 도망치고, 어쩔 수 없이 반란군에 가담하게 된 장병들은 이때 틈을 타 손을 들고 항복하여 1시간 만에 반란군을 격퇴하였다.

 

백인엽 부연대장은 여세를 몰아 순천을 점령하기 위해 오후 4시에 순천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순천 시내로 진격하려면 300고지가 여러 개 있는데 반란군이 이 고지에서 저지하면 공격이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먼저 수색대에게 고지에 반란군이 있는지 수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반란군이 전혀 없다는 보고를 받은 백인엽은 천만다행으로 생각하였다. 김지회가 얼마나 부족한 인물이었는지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압군의 여수 1차 탈환작전이 실패할 때, 지창수가 썼던 작전이 바로 홍순석의 견해였기 때문이다.

 

백인엽 소령이 순천 시내로 들어가자 고지에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사이에서 반란군이 공격해왔다. 그러나 12연대가 공격하자 반란군은 힘없이 무너지고 도망쳤다.

 

송석하 3연대는 순천 서쪽을 공격해 들어갔다. 김지회 반란군 사령관은 12연대와 3연대는 순천을 공격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부대 내의 세포원 공작들에 의해 장병들이 반란군과 합세하였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2연대 2대대 5중대장 김응록 대위는 김희준 대대장을 죽이고 5중대를 반란군 중대로 만들어 12연대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결국 김희준 대대장을 공격하였으나, 김희준 대대장은 기적적으로 살고 보좌관들만 부상을 입었다. 김희준 대대장은 즉시 김응록 5중대장을 체포하여 헌병대로 넘겼다. 김응록은 남로당원으로 12연대를 반란군으로 만들려다가 부대 내의 좌익 세포가 약하고, 시간이 없어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체포된 것이었다.

 

이어 김희준 대대장은 김응록 후임으로 김한수 중위를 5중대장에 임명하고 81밀리 박격포 2문을 주어 반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대 안에 남로당 세포가 있어 또 반란을 일으키려 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김한수 중위는 명령대로 박격포 2문으로 순천중학교에 있는 반란군 본부를 계속 공격하였다. 반란군 본부는 박격포 2문으로 쑥밭이 되고 있었다.

 

이 틈을 타 김희준 대대장이 12연대를 동원하여 공격해 들어갔다. 반란군은 예상을 뒤엎고 신속하게 12연대가 공격해오자 순천교 근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백선엽 참모장은 연락기를 타고 반란군의 움직임을 동생 백인엽 부연대장에게 알려주어 백인엽은 형님의 지시대로 공격해 들어갔다. 12연대는 순천교를 향해 반란군을 추격하였다. 반란군은 동천강을 배수진으로 하여 12연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12연대 선발부대가 동천강 쪽으로 접근하자 공격을 하였다.

 

12연대 2대대 8중대 송호림 중대장은 선봉에서 반란군을 공격하여 농업학교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9중대가 다른 부대와 전선을 유지하면서 공격해야 하는데 9중대만 돌출되어 반란군에 포위되었다. 송 중대장은 아차하는 순간에 포위되자 50명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끌고 반란군 1개 소대를 역포위하여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나 반란군 1개 중대에 의해 또다시 포위되어 포위망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때 송호림 중대장이 싸우지 말고 협상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자 이 말을 진압군이 반란군에 합류하겠다는 뜻으로 알았다. 반란군 대표가 나와 속히 합류하라고 하자, 송호림은 때를 놓치지 않고 중대 돌격 명령을 내렸다. 반란군은 진압군이 합류할 줄 알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압군 중대장이 갑자기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중대장이 먼저 반란군을 향해 뛰어드니 반란군은 이 반전(反轉)에 허둥거리고만 있었다.

 

송호림 중대장은 반란군을 향해 달리다 보니, 어느새 반란군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투철한 군인정신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당시 이 뜻밖의 상황에 반란군도 얼떨떨하고 있는 것을 보고, 송 중대장은 이들을 향해 차렷!”하고 구령을 붙였다. 그러자 고함치는 반란군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송호림은 용기를 내어 큰소리로,

너희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총을 버려라!”

하고 명령을 하였고, 1개 중대 187명이 총을 버리고 손을 들었다. 그런데 송 중대장의 뒤를 따라온 장병들은 10 명밖에 안 되어 이들을 다 인솔해 간다는 것이 큰일이었다. 송 중대장은 10명에게 먼저 땅에 내려놓은 총을 회수하게 하고, 10명씩 앉게 한 다음 대대장에게 보고하니 지원군이 와서 187명을 인솔해 갔다. 187명은 조사 결과, 좌익들에 의해 할 수 없이 반란군에 가담한 사람들로 판명되었다.

 

반란군은 대패하여 일부는 광양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반란군은 순천교에 집결하여 결사 항전할 태세였다. 진압군은 한때 보성과 광양에서 패하여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순천 전투의 승리로 사기가 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대전의 2연대 1개 대대와 강필원 대위가 이끄는 장갑차 부대 장갑차 20대가 증원 차 도착하여 진압군은 사기충천하였다.

 

반란군 김지회는 순천에서 계속 항전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만일 진압군이 광양을 막아버리면, 반란군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반란군이 광양에서 승리하자, 김지회는 밤 10시를 기해 순천을 빠져 광양과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무기와 식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021일 밤 진압군 사령관 송호성, 참모장 백선엽, 그리고 연대장들이 모였다. 먼저 백선엽 참모장이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백선엽:

보성과 광양에서는 진압군이 패하였으나 순천은 승리해서 다행입니다. 반란군 2개 대대는 순천교에 집결해 있고, 보성과 광양과 여수에 1개 대대가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송호성:

순천과 여수를 빨리 탈환하여야 전국의 남로당원들이 극성을 부리지 않지 탈환이 늦어지면 제주도 같은데서 남로당원들이 더 극성을 부려 안 되는 순천을 탈환 즉시 여수를 공격해야 합니다.

 

백선엽:

즉시 광양과 백운산과 지리산 입구를 봉쇄하여 반란군을 진압해야지, 만일 반란군이 광양, 백운산, 지리산으로 빠져나가면 진압이 장기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국내가 혼란할 것이며, 제주도에서는 남로당원들이 더욱더 극성을 부려 안 됩니다.

 

이 회의에서 송호성 사령관이 자기주장을 고집하여, 결국 다음 날 순천과 여수를 탈환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어, 결국 김지회 반란군은 광양을 거쳐 백운산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6. 순천 여수 탈환

= 반란군 지리산 입산 -

 

아침 6시 진압군은 장갑차를 선두에 세우고 순천 시내로 진격하면서 순천교 근방의 반란군 진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시내에 도착하고 보니 반란군은 지난 밤 다 도망쳐버리고 한 명도 없었다. 지휜관들은 그때서야 백선엽 참모장의 주장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더욱 기막힌 것은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갔으나 반란군은 보이지 않고 젊은이들과 남녀 학생들이 진압군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결국 자기들은 도망치고, 그 도망을 위해 어린 것들을 엄호(掩護)하게 한 것이었다. 참으로 가증스런 빨갱이들의 생각과 행동이었다.

 

드디어 진압군이 순천을 탈환한 후 순천경찰서에 도착하여 보니 수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아무리 혁명도 좋고 좋은 세상도 좋지만, 동족(同族)끼리 싸우지 말자 하면서 동족을 이토록 죽일 수는 없다. 빨갱이들은 동족이 아니고 적이다!”

 

이렇게 진압군들은 좌익들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고, 이 잔인함은 국군과 경찰에 전염되어 후일 부역자 처형과 같은 극렬한 피의 보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진압군은 약 5만여 명의 순천시민들을 순천 북초등학교와 다른 학교에 분산하여 집합시킨 후, 남로당원과 반란 가담자를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1. 우선 40세 이하 남자로 군용 팬티를 입은 자,

2. 머리를 짧게 자른 자를 찾아 반란군 여부를 조사하였다.

 

이때 경찰서에서는 인민재판을 하여 수십 명의 경찰을 죽인 인민재판 검사 박창길과 인민재판위원 11명을 공개처형 하였다. 이때 김종원 대위의 좌익 공개처형 방법은 눈을 뜨고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반란 첫날 여수에서 자행된 좌익반란군들의 학살은 이보다 더한다. 여순경 2명을 그것도 성기(性器)에 죽창을 찔러 죽인 예는 세계 역사상 오직 대한민국 좌익들밖에 없다.

 

무수한 양민(良民)을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처형한 좌익들과 그에 대한 보복,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박혀있을지 모르는 좌익 색출을 위한, 그리하여 여수와 순천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수복하기 위한 일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피는 피를 부르고 있었다.

 

김지회 반란군은 21일 밤중에 순천 방어에 실패하여 그 길로 순천에서 광양까지 8킬로 걸어 비봉산까지 도착하여 숨는데 성공하였다.

 

백선엽 참모장은 지금이라도 3연대와 6연대로 하여금 하동에서 구례까지 봉쇄해야 하여 반란군이 지리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12연대와 15연대는 반란군을 추격하고, 3연대 1개 대대와 장갑부대로 여수를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백선엽이 이러한 작전계획을 참모회의에서 설명하자, 지난번의 실패를 다시 하지 않으려고 모두들 동의하여 백선엽의 작전 계획대로 작전을 세워 반란군이 지리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하였다.

 

1024일 아침 6. 송호성 사령관이 직접 지휘하여 장갑부대가 선발부대가 되고 3연대 1개 대대가 뒤를 이어 여수 탈환을 위해 진격해 들어갔다. 여수 반란군은 순천에서 맥없이 진압군에 당한 것을 기억하고 이번에는 2개 중대로 고지에 60밀리 박격포와 기관총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좌익청년들로 조직하여 호를 깊이 파서 진지를 구축하고 도로 양쪽에서 매복하고 진압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수도 순천과 같아서 도로 양쪽에 200고지의 장군봉을 점령하기 전에는 여수를 탈환하기 어려웠다. 지창수가 지휘하는 반란군은 미평동 330고지와 종고산과 구봉산 고지를 점령하고 진압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호성은 진압군이 순천을 쉽게 탈환하였기 때문에 여수도 쉽게 탈환할 것으로 판단하고 고지에 수색대를 보내 수색하지도 않고 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고지에서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주방한 반란군의 공격으로 진압군은 부상자가 속출하고 전열이 흩어졌으며, 송호성 사령관은 고막이 찢어지고 차에서 떨어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송석하 3연대 부연대장이 장갑부대와 장병들에게 진격하라!”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격려해도 고지에서 공격하는 반란군을 해볼 수가 없었다. 진압군은 대패하여 순천으로 후퇴하였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진압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신문에는 <송호성 사령관 부상, 1차 여수공격 실패>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이를 보고 남로당에서는 만세를 불렀다. 1025일 하루 동안 진압군은 겁을 먹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수 반란군 1개 대대는 진압군이 장갑차를 동원하여 고지를 점령하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밤중에 아무런 피해 없이 백운산으로 도망쳤다.

 

백선엽 참모장이 광양에서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던 12연대로 하여금 여수를 공격하게 하였다. 2연대가 1개 대대, 5연대 1개 대대까지 여수 탈환에 투입하였다.

 

여수에 있는 반란군은 광양을 거쳐 백운산으로 도망쳤다. 지창수 등 일부는 벌교로 도망쳤고, 남로당 무장세력 1천여 명과 동조세력 1,200여 명이 여수를 지키고 있었다. 역시 순천과 마찬가지로 반란군의 후퇴를 지원하기 위해 남겨진 불쌍한 엄호세력들이었다.

 

1026일 아침 6, 진압군 12연대, 3연대,2연대, 장갑부대, 5연대 1개 대대가 여수로 진격하고, 여수항에서 다른 부대가 상륙 협공하기로 하고 진격해 들어갔다. 장갑부대가 선발부대가 되어 전진하고, 12연대가 동쪽, 3연대는 200고지와 종고산, 2연대는 여수 서부를 담당 공격하였으나 반란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진압군은 고지에서 여수 시내를 향해 81밀리 박격포로 위협사격을 하였다.

 

백인엽 소령이 장갑차를 타고 선두에 서서 여수 시내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여수는 순천과 달리 저항이 의외로 강하였다. 반란군은 보이지 않고 젊은 학생들이 99식 소총을 가지고 저항하고 있었다. 27일 오후 330, 진압군은 하루 종일 시가전을 해서 여수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이 틈에 반란군은 백운산에서 지리산 화엄사 옆 문수골로 진압군의 방해 없이 들어갔고, 여수 시내에서는 (20일부터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어 26일까지 숨어 있던) 국군, 경찰, 우익들이 만세를 부르며 나왔다. 7일 동안 우익이 죽는 세상에서 이제는 좌익이 죽는 세상이 되었다.

 

불과 일주일을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동포를 죽이고, 끝내 자신들도 사살당하는 이 우매함. 우리 민족사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한()의 강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7. 토벌(討伐), 그 이후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는 정보를 입수한 12연대는 구례에 집결하였다. 1029일 아침6, 12연대 2대대와 3대대는 구례 화엄사에 도착하여 계곡과 능선을 따라 1,500미터 노고단까지 산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29~313일을 밤낮으로 반란군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어디에 숨었는지 반란군은 흔적조차 없었다. 적어도 천 명 정도는 지리산으로 도망쳤을 것이었다.

 

여수와 순천 지역의 어린 학생들과 지역 좌익들을 희생물로 남기고 도망친 반란군은 모두 화엄사 문수골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백인엽의 끈질긴 토벌작전으로 김지회는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끝나던 44, 한웅진 대위가 인솔하는 진압군과 거창 개관산 전투를 끝으로, 194949일 산내면 반선리 어느 선술집에서 마지막 술과 밥을 얻어먹다가 사살 당한다. 481019일 반란을 일으킨 지 약 6개월만의 일이었다. 지창수는 이미 벌교 전투에서 죽었다.

 

결국 나머지 반란군들도 처절하게 토벌되고, 광주도림병원 간호사 출신 김지회의 애인 조경순도 죽었다. 지리산 여장군으로 불리웠던 그녀는 제주도 출신으로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의 레포로 김지회와 접촉하다가 애인관계로 발전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반란군들은 전남 전 지역에 걸쳐 군 지역 좌익들의 도움을 받아 퍼져나갔다. 심지어 순천 여수와는 거리가 먼 서해안까지, 영광 고창 지역까지 이들 반란군들이 출몰하였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원한을 쌓았는지 모른다. 전쟁 전까지 그들은 산사람으로 불리우면서 살아남아 있다가 인민군의 남침에 따라 다시 등장한다. 소위 구빨치들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른다.

 

장흥 유치와 가까운 영암이 약 8000여 명이 빨치산들에 의해 학살되었고, 그리고 영광, 고창 지역 학살이 7000여 명이었으니, 기타 목포, 무안, 화순, 장성, 담양 등 섬 지역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에서 발생한 좌익들의 학살은 그 잔인함뿐만 아니라 학살자 수에 있어서도 전남이 가장 많았다. 전남이 그토록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모두 이 여순반란사건의 결과였다.

 

그러나 14연대 반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박헌영은 14연대 반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국군 내부의 좌익들을 조종하여 연속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어 광주 4연대가 반란에 동참하고 토벌되어 4연대는 해체되고 만다.

 

대구 6연대도 48112일 반란에 가담한다. 6연대의 1차 반란은 곧 진압되어 40여 명이 다부동 쪽으로 도망쳤다. 48126일 하사관 중심의 잔여 좌익들이 2, 3차 반란을 일으켰다 토벌되고, 6연대는 해체된다.

 

이어 군대 내부의 심각한 상황을 보고 이승만 정부는 군대 정풍운동을 벌여 좌익들을 숙청한다. 481220일 드디어 국가보안법이 공포된다. 정풍운동과 보안법이 시행되자, 이에 못 견딘 춘천 8연대 2개 대대가 부대원 전부를 이끌고 월북하였다.

 

마치 베트남 패망의 징후(徵候)를 보고 있다 할 것이다. 그 베트남보다 30여 년 전에 한반도에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승산을 판단한 김일성은 6.25를 일으켰다.

 

여순반란사건은 군대 정풍운동과 국가보안법 제정을 촉발시킨 반란이었다. 만약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군대 정풍운동은 없었을 것이고, 군대 정풍 운동이 없었다면 국군은 모두 붉은 군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6.25. 북한의 남침과 국군의 호응이 예상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여순반란사건의 결과로 인해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좌익의 인민재판 학살과 우익의 보복이라는 구조적 적대감이 4810월부터 506.25일까지 무려 2년여를 지속한 결과, 우리 민족은 용서와 화해의 기회를 잃었다. 전쟁 후에도 북의 끊임없는 침략도발이 있었고, 우리는 좌익의 후예들에게 연좌제를 씌웠다. 그리고 한()을 지속시켜 나갔다.

 

오늘날 대()를 이어가는 민주당 중심의 좌익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2, 3대를 이어가는 좌익 집안의 내력을 보면서, 다시 회한에 잠긴다. 북은 도발과 침략을 멈추지 않고, 대한민국 내 좌익들은 대()를 이어 북을 추종하고 있는 현실. 용서와 화해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대()를 끊을 것인가.

 

소설 태백산맥의 염상진이라는 인물의 행로가 바로 이 여순반란사건으로부터 전개된다는 것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 아닌가.

 

8. 맺음말

 

- 반란이 남긴 것 -

 

1) 6.25 남침 실패의 두 가지 교훈

 

전쟁이 끝난 후 북한 김일성이 땅을 치고 후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가 6.25 때 서울을 점령하고 3일을 머문 일이다. 서울 점령 후 무려 3. 만약 그 기간에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곧바로 부산으로 진격하였더라면, 미군과 유엔군은 군대를 파견할 시간을 벌지 못하였을 것이고, 남한은 말 그대로 적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서울에서 3일을 기다렸다. 남침만 한다면, 30만 남로당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박헌영의 말만 믿은 것이다. 김일성은 이 폭동이야말로 인민군의 남한 침략이라는 전쟁 범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3일 동안 제주 4.3 사건 같은 폭동을 기다렸음이다. 그리고 이승만의 항복을 기다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誤判)이었고 실패였다.

 

또 하나는 왜 남로당이 합법적인 의회 진출을 꾀하지 않고, 제주 4.3 폭동과 여순반란 사건을 일으켰던가.’ 라는 자기반성이었다.

 

만약 남로당이 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에 참여하였더라면, 최소한 제주에서만도 2석은 차지하였을 것이고, 전국을 통틀어 남로당 의석수는 제1당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남한은 전쟁 없이도 적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사가(史家)들의 판단이다.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보자. 남로당은 4610월 대구폭동 사건을 즈음하여 폭동을 지휘하던 주요 간부들이 잠적하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결성한 정당이다. 461123일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연합하여 남로당을 결성하여 이를 박헌영이 주도(主導)하였고, 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로당이 탄생하였다.

 

그 후 박헌영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월북하였고, 남로당은 불법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평양으로 가지 않고 해주에서 강동정치학원을 열었다. 그리고 수많은 월북자들을 빨치산으로 양성하는 한편 남한 좌익들의 파업과 폭동을 지휘하였다.

 

특히 6.25 전쟁 전(),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헌영이 남파한 유격대의 활약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눈앞에 마을을 바라보면서 얼어죽은 여빨치산의 최후도 바로 그 당시의 일이었다.

 

그런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刻印)시켜주기 위해,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 제주 4.3사건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주모자 김달삼은 남로당 중앙당 선전부장 강문석의 사위이자,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출신이었다.

 

2) 전교조와 남로당

 

여기에서 잠시, 당시의 상황 속에서 오늘날 학생을 세뇌시키고 남한 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전교조라는 존재와 관련된 문제를 지적해 보자. 해방 이후 남로당에는 적화사업으로 수많은 붉은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포섭하여 세뇌시켜 폭동의 중심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 예로써, 제주 4.3에 이어 여순반란사건에도 붉은 교사들이 양성한 학생들이 국군과 싸웠다. 당시 기록을 보면 김지회, 지창수를 비롯한 반란군에 가담한 남로당 무장 세력은 모두 1,000여명, 여기에 학생을 비롯한 동조자가 무려 1,200명이었다. 도합 2,200명이었다.

 

국군 아저씨, 잠깐 이리 와 보세요.”

 

다가간 국군에게 치마폭 속에 숨긴 권총을 꺼내든 여학생들. 총이 발사되고, 사망한 동료를 본 국군들. 이어 여수가 탈환이 되고, 국군은 이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그 청순한 여학생에게 총을 들려준 이들이 바로 붉은 교사들이었다. 혹자(或者)는 여학생들의 국군사살 사건이 거짓이라 하나, 국방부 전사(戰史)는 이를 사실로 규정하고 있다.

 

그 후 지리산으로 백암산으로 선생님을 따라 입산(入山)하여 빨치산이 되어 비참하게 죽어간 학생들. 이들을 누가 비극의 나락으로 끌어갔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너와 내 자식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교사들이 학교에서 우리 학생들 곁에 있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 바로 지금의 전교조라는 것은 이젠 널리 알려진 상식(常識)이다.

 

여담(餘談)을 더해 본다. 전교조는 태극기에 대해 경례를 하지 않는다. 소위 민중의례를 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묵념은 한다. 웃기게도 그 묵념의 구호가 바로 이렇다.

 

통일을 위해 순국하신 선배 교사 선생님들께 묵념을 올립시다.”

 

그 선배들이란, 김달삼 이하 여순반란 때 활동하던붉은 교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달삼은, 1948년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3월초 제주 조천면 신촌리에서 19명의 간부들과 폭동을 모의하였다. 그리고 김달삼은 제주 경비를 위해 파견된 9연대 안에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과 남로당 유격대원들을 동원, 43일 새벽 두 시에 제주 도내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그 비극을 시작하였다.

 

이때 김달삼에 의해 학살(虐殺)당한 사람 중에는 14(문숙자), 12(문정자) 소녀들도 있었다. 학살 대상은 우익인사들과 그 가족, 경찰과 대청단원들의 가족들이었다. 살해 도구는 모두 죽창이었다. 어린 소녀들의 순결한 이름과 여린 목숨까지 그들은 처단해야할 적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 후 김달삼은 9연대장 김익렬과 평화 협상을 맺고, 북한 정부 수립을 위한 8.25 선거일에 맞춰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갔다. 이때 김달삼이 가지고 간 것이 제주도민들이 인민공화국 수립을 찬성하는 투표용지였다. 당시 제주도 8만 유권자 중에서 무려 5만이나 되는 숫자였다.

 

이후 제주도는 이덕구에게 맡겨지고, 이 자가 194967일 사살될 때까지 1,700명에 이르는 우익 계열의 제주도민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육지 사람들이 우리 형제를 죽인다.’고 선동하여, 그 결과 선량한 제주도민들이 지역적 온정(溫情)에 합세하였고, 수많은 군경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리하여 그 보복으로 무려 1만 이상이 죽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로 파견될 14연대가 마침내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면서 여순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이 토벌되면서 대한민국은 형제 동포들이 적과 적으로 나뉘어 6.25가 끝날 때까지 죽이고 죽이는 지옥도(地獄道)를 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주의 비극이 6.25 침략을 좌절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한 살극(殺劇)을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로당과 빨치산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남로당을 탈당하였다. 그리고 군대는 정풍운동이 일어났다. 군대 내의 좌익들을 모두 색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6.25가 일어났어도 군대와 국민들은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게 6.25는 끝났고, 북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3) 좌익들의 제도권 진출 음모

 

남침 전쟁의 실패 이유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김대중 이후의 좌익들의 행보(行步)이다. 김대중은 집권 초기에 자생(自生) 빨갱이로 이름이 높은 민노당을 합법화시켰다. 그리고 날치기를 하면서까지 전교조도 합법화시켜 주었다. 제주 4.3 사건의 실패를 거울삼은 것이다. 그 결과 좌익들은 모두 정치 제도권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어 국가보안법 폐지 및 미군철수와 연방제 통일운동이 이들에 의해 결합되고 진행되었다. 더구나 이 모든 것들은 법과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펼쳐졌다.

 

정치권력뿐만이 아니었다. 교육 문화 행정부까지도 좌익들의 무대가 되었다. 반미 정서를 유발시키기 위해 그들은 영화도 만들고 문학작품도 주도하게 되었다. 교육은 전교조가 장악하여 빨치산을 추모하였다. 통일부는 김정일 정권의 선군정치를 돕기 위해 인민군을 먹여 살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400만석 보내기 법제화 운동도 펼쳐지고 있었다.

 

좌익 세상을 위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6.25 당시 빨치산이었거나 동조하였던 당사자들에 대한 명예도 신원도 회복시켜 주었다. 빨치산과 내통한 천씨 일족에 의해 무려 50여명이나 학살당한 전북 무장 죽림마을 사건 주모자 신원회복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영암 금정에 세워진 추모비도, 제주 4.3사건 기념공원도 바로 다름없는 빨갱이들의 명예 회복그것이었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은 더욱 정교한 공작을 펼쳤다. 그는 민주의 이름으로 가장(假裝)한 모든 사건에 명예를 부여하였다. 남민전과 같은 대한민국 내 폭동음모 사건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하고, 정부 부처 각 요로(要路)에 이들 386 주사파 좌익들을 배치하였다. 이들이 지금 대한민국 행정부와 각부 부처(部處)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왜 김대중이 민노당과 전교조 같은 무리들을 합법화 시켰는가.’에 대한 답을 남로당의 실패에서 찾았다. 만약 제주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5.10선거에 참여했더라면? 그리고 결정적인 시기에 정치권력과 남로당 유격대, 그리고 국군과 경찰에 침투한 프락치들을 동원했더라면?

 

그래서 김대중은 이를 깨닫고, 한총련으로부터 출발한 주사파들을 합법화시켜 살려내어 정치권으로 인도해 왔다. 그리고 이들이 성장하여 오늘날 결정적 시기를 노리며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좌파 척결의 시작

 

6.25 남침의 비극과 제주 4.3 폭동,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 박헌영은 19563, 소련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기 직전 대성산 임시 사형장에서 김일성에 의해 총살됐다. 죄명(罪名)미 제국주의 고용간첩과 정부 전복 음모였다. 그때 그의 나이 53, 참으로 죄 많은 최후였다.

 

그 전에 여순반란사건부터 실질적인 지도를 하였던 이현상도 지리산에서 김일성이 보낸 밀사에게 사살당했다. 한국판 마타하리라는 김수임의 애인이며 박헌영의 오른팔이었던 이강국도 고문 끝에 총살됐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일으킨 박낙종은 목포감옥에서 각각 사형당했다.

 

그 후 60, 그러나 악명(惡名) 높았던 남로당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재기를 노리고 깊이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드디어 김대중 시대를 맞아 그들은 민노당으로, 실천연대로, 한총련으로, 전교조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국회로 진출하여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활동을 벌이는 한편, 나라 전체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으로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민노총은 당시 남로당 소속으로 전국 노동자를 이끌던, 전평(全平)의 후예라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으며, 온갖 노동자 농민단체를 껴안고 좌익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들이 반드시 폐지시키고자 노리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당시는 남로당이 합법적인 정당이므로 처벌할 수가 없었다. 미국도 오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어리석게도 좌익들의 활동을 묵인하고 있었고, 살인 파업과 같은 극렬 노동운동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라 안팎에서 소요(騷擾)와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처벌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194812월에 제정된 것이 국가보안법이었다.

 

이 국가보안법은 6.25 전부터 좌익들이 철폐를 주장하던 것이었고, 미군철수 역시 소련군의 북한 퇴각 이후부터 줄기차게 주장하던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주장이 모두 지금도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북의 지시를 받는 남로당의 후예들, 살아있는 주사파 좌익들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날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거짓보도를 통해 발생한 엄청난 좌익들의 음모와 광란(狂亂)을 보았다. 그리고 동맹국 미국을 적으로 알고 있는 세뇌된 학생들이 군에 입대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최근 정부에 반기를 든 해병대 대령도 보았다. 국군에 좌익들이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사법부에 침투한 좌익운동권 판사들의 만행도 지켜보았다.

 

이들은 모두 14연대 반란 당시 군에 좌익들이 침투하던 방법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젠 좌익정권 10년 동안 적화된 대한민국 국군을 정화(淨化)해야 한다. 6.25 이전 정풍운동의 재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이 길러놓은 제도권 내에 있는 정치좌익들을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민주화를 가장(假裝)진보라는 이름의 민중민주 좌익들도 걸려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좌익들은 치열하게 탄핵을 노리고 있다. 필자(筆者)는 이번 정권에서 밀려난 전교조를 비롯한 좌파들이 정체를 숨기고 정부 안으로 기어들고 있음을 제보 받은 바 있다. 후일 이들로 인해 발생할 불행은 촛불시위를 능가할 것이다.

 

그리하여 좌파들은 끊임없이 남남갈등을 획책하고 있었다. 정부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여 나라를 파탄 내놓고 그 책임을 물을 것이었다. 세상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고, 국군을 적으로 호도하고, 양민 학살을 주도한 빨치산 동지를 감싸주어야 할 동포로 위장시키고 있었다. 심지어 문재인은 빨치산에 의한 양민학살까지 국군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보상을 해 주었다.

 

여순반란이 진행되면서, 여순 인근 지역에선 비합적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민애청(民愛靑)", "민주여성동맹(民主女性同盟)", "합동노조(合同勞組)", "교원노조(敎員勞組)", "철도노조(鐵道勞組)" 등이 나타나 제각기 간판을 내걸었다.

 

우리는 여순반란사건 당시에도 교원노조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여순지역만 이러했으니,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단체들이 있었겠는가.

 

철없는 어린 학생들은 교실에서 전교조 교사들에게 의해 빨치산 추모제며 촛불시위 집회에 동원되고 있었다. 좌익들은 미국을 적으로 취급하면서도 자식들만큼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남의 자식들은 반미운동이나 진단평가 반대, 반정부운동에 동원하면서 사상의 노리개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김대중 이후 노무현에 이르러 엄청나게 번식한 좌익들이 결정적 시기에 벌일 폭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의 아이들도 여순반란사건에 등장한 학생들처럼 좌익 엄호세력으로 이용당할 것인가.

 

필자(筆者)는 지금 마치 참혹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이럴 수가 어디 있겠는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라는 자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한다? 어디 이럴 수가 있는가. 이제 우리는 2024년을 보내고 있다.그리고 북한 김정은은 통일포기선언을 하였다. 임종석에 이어 문재인도 통일을 포기하고 두 국가체제로 가자고 한다. 그리고 헌법 영토조항도 고치자고 한다. 반역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남한 내 민주당 자생간첩들이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다만 추상같은 단죄(斷罪)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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