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교육이 사는 길(5) : 효 사례의 시의성(時宜性)
김종두(한효총 사무총장,전 국방대/경민대/성산효대학원 교수)
교육(敎育)은 ‘교화육성(敎化育成)’의 줄임말이다. ‘교화’는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육성’은 “길러 자라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지식 주입’의 ‘교(敎)’보다 ‘인성 함양’의 ‘육(育)’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이는 “교육은 이상적인 인간을 형성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을 지력(知力)으로만 교육하고 도덕(道德)으로 교육하지 않는다면 사회에 대하여 위험을 기르는 것이 된다(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표현과도 일치한다.
효교육은 효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知]이 출발이다. 그런데 효는 아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더욱 중요하므로 ‘지정의행(知情意行)’의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효는 ‘덕성의 근본[孝德之本也]’이자 ‘교육의 원천[敎之所由生也]’이라는 점에서, 효교육에 이용하는 사례는 실제로 있었거나, 있을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래야 공감을 얻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효교육에 인용되고 있는 기존의 사례들, 예컨대 13살 된 딸이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요리해드린 내용이 신라 경덕왕(景德王)에게 보고되어 큰 상을 받았다는 ‘향득사지(向得舍知)’,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손순(孫順)은, 아들이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어 어머니가 배고파하시므로 아들을 땅에 묻어 죽이려고 땅을 파던 중에 하늘이 감동해서 석종(石鐘)이 나왔고, 이를 보고받은 신라 흥덕왕(興德王)이 손순에게 큰 상을 내렸다는 ‘손순매아(孫順埋兒)’, 또한 조선시대에 겨울 강추위 속에서 잉어를 잡숫고 싶어 하는 어머니를 위해 윗옷을 벗고 얼음 위에 엎드리니 얼음이 녹아 잉어가 튀어 올라왔고, 이를 어머니께 고아드렸다는 ‘성무구어(成茂求魚)’, 소설 「심청전」 등은 믿기도 어렵거니와 시의에도 맞지 않는 사례들이다.
이점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열부론(烈婦論)」에서 ‘부모를 봉양할 때의 신령함은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면서 “병들어 죽은 남편을 따라 죽은 아내를 열부(烈婦)라 칭하며, 정려문(旌閭門)을 세워주는 일은 잘못이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자식을 돌보고 시부모님을 봉양해야 해야지 멀쩡한 생목숨을 끊은 것은 천륜을 거역한 것인데, 상을 준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때문에 산재(散在)해 있는 정려문의 내용을 효교육 사례로 인용하는 데는 옥석(玉石)이 가려져야 한다.
앞글(1: 효 인식의 문제)에서 제시했듯이,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대학교수들이 “인성교육에서 효는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효’를 잘 못 이해한 점도 있지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들은 효 사례가 그때는 신기했지만, 성장해서 생각해보니 ‘허황(虛荒) 된 효’로 인식하게 된 것 또한 영향이 크다고 생각된다.
오늘날의 효교육은 맹자의 ‘역자교지(易子敎之)’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자식은 서로 바꿔서 가르쳐야 한다.”는 뜻인데, 윤리 영역에 속하는 효교육은, 부모가 직접 하기보다는 서로 바꾸어 가르칠 때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지금으로 보면 가정과 교육기관이 역할을 바꾸어서 교육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는 자녀들이 가정에서보다 교육기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핵가족화되면서 가정에서 밥상머리 교육 등 체화학습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교육기관에서 효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여건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교과서를 보아도 효는 중학교의 「도덕」 과목과 고등학교의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에 약간 언급되는 정도이다 보니 교사마다 자기 생각대로 효를 말하고, 자기 잣대로 효 사례를 인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방학 기간에 받을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에 효 관련 과목을 포함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효교육은 가정과 학교, 사회와 국가 등 각각의 영역에서 이루어 지지만 교육의 내용과 방식은 각기 다르다. 특히 가정과 학교에서 하는 교육은 부모와 교사가 직접 바른 ‘본보기’를 보여주는 만큼의 왕도(王道)가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들려주어서 알게 하는 ‘청지(聽知)’와 보여주어서 알게 하는 ‘시지(示知)’가 조화를 이룰 때 절로 되는 ‘체화학습(體化學習)’의 형태가 가장 바람직함으로 효 사례 또한 이에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실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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