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은 어떻게 좌파화 되었는가?
조선조 사람들은 호남을 거론하게 되면 반드시 그 반대편에 영남을 대조시켰다. 호남인은 사박(詐薄)하지만, 영남인은 언행이 무겁고 믿을만 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호남인은 간사하고 경박스럽지만, 영남인은 질각근중(質慤謹重), 인간됨이 무겁고 믿을 만하다는 식의 평가였다. 호남인들의 인간성 자체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평가였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조 창업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의 격동기때마다, 영남인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호남인들이 온몸으로 부딪히고 해결해 나갈 때, 영남인들은 나서지 않았다. 간난을 이기고 밥상이 다 차려지면, 그때서야 그들이 밥상을 독차지했던 역사는 있었다.
고려 현종시대 최제안 이후 신라계가 고려조정을 독점하자, 경주출신들이 정관계에 무수히 진출한다. 김부식도 경주출신이었고 그의 아들 김돈중도 이때 벼슬에 오른다. 그리고 무신들에게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횡포를 저지르며 무신정변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차려놓은 밥상마저 엎어버린 일이었다.
조선조 때도 영남인들은 다시 역사를 반복시킨다. 퇴계이황 제자들은 퇴계학문의 맥을 이은 영남학파임을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리고 변란 때는 도망치기 바빴던 그들이 호남인들을 하시(下視)하며 간사하고 경박하다는 식의 평가를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언행이 무겁고 믿음직하여 숨고 도망쳤는가. 후일 이들이 바로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를 하며 조선을 멸망으로 이끈다.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가 어떻게 나라를 망쳤는지는 대원군의 일화를 보연 알 수 있다. 대원군이 집권 후 안동김씨집안에 요구했던 금액이 상상을 초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냥 십만냥도 아닌 그 많은 돈을 불과 한달이 좀 못되어 만들어내더란다. 얼마나 긁어 모았으면 그 정도였을까 싶다. 대부분 벼슬을 팔고 승진을 위한 대가였을 것이니, 그들이 부임지로 가서 또 얼마나 백성들을 수탈하였을까를 상상해보라. 그리하여 동학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조선은 망한다.
이렇게 나라를 또 망친 신라계가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지역감정의 골을 깊이 파고 있음을 잊지말라. 그들이 또 나라와 민족을 망국으로 이끌고 있음이다.
다시 조선말기로 돌아가보자. 당시 실학자인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똑같은 평가를 내린다. 고리타분한 성리학의 폐해에서 깨어난 실학자마저 이 모양이었으니, 일반 유학자들은 어떠했겠는가. 이들이 실제로 호남인을 겪어보고 주장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풍문으로 들은 바를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짐작컨대, 호남인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는 널리 일반화되어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상황이었으리라.
구한말을 거쳐 일제시대와 6.25를 지나면서 호남인에 대한 평가는 더욱더 굳어져 일반인에게도 정설처럼 널리 퍼져갔다. 고정관념이 또다른 고정관녕을 낳고 전파된 것이다.
오죽하면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나타났을 것인가. 단 한번만이라도 이러한 멸시와 조롱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에 적개심을 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기간이 훈요십조 이후 무려 1000년 동안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호남차별은 호남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호남선은 김영삼 시대까지 단선이었다. 철로가 하나이기에 기차가 많이 다닐 수 없고, 행여 맞은 편에서 급행이라도 오면 어디에서든 정거하여 길을 비껴줘야 했다.
아무리 복선의 필요성을 애원하다시피 했어도, 당시 정권은 들은 척도 아니했다. '쓸만한 기업도 없는데, 무슨 복선이 필요한가' 이에 기업도 답한다. '기차 복선도 안된 곳에 어떻게 기업을 세우겠는가' 호남선 복선을 둘러싼 이런 대화는 끝없이 이어진다. 지역이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김대중대통령 시대가 열리자 1년도 안되어 호남선은 복선이 되었다. 왜 호남인들이 지금까지 김대중을 떠받들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될 것이다.
호남 멸시와 조롱을 단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인생관마저 바꿔진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인생관이 바꿔져,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다는 호남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한(恨)이 골수에 맺힌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이 상황속에 공산주의가 파고 들었다. 농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지주를 없애고 토지를 나눠준다는 이 기막힌 제안에 반대할 그 누가 있었겠는가. 호남 민중 60%가 인민공화국 편이었다는 사실이 있다. 농토가 많았던 풍요의 아이러니였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진주하기 전, 전남 서해안 지역 인민공화국 동조자들과 빨치산들이 진을 친 곳이 있었다. 상사화 축제로 이름난 용추사와 불갑사가 그곳이다. 그곳 용추사에 무려 2만명이 모여 시장을 이루면, 인민화폐가 통용되었을 정도라 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여순반란으로 산으로 간 구빨치산들과 6.25 이후 발생한 신빨치산들, 그리고 토지 나눠준다는 말에 속은 농민들은 서로 죽고 죽이면서 또다른 한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귀함도 천함도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말하던 공산당을 어찌 잊겠는가.
해묵은 의식들이 깨어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훈요십조와 풍전세류는 그 폐해를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비호남인 그들 눈에 호남인들은 여전히 전라도놈이었고, 천박한 개땅쇠였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전라도는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동학이 고부백산에서 혁명의 깃발을 올리게 된 것도 수탈 때문이었다. 풍요로운 넓은 들. 그래서 뇌물을 써서라도 전라도로 부임하기를 소원한 관리들이 많았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 내역을 단 한 가지라도 살펴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의병들도 전라도로 몰려왔다. 군량미를 조달하기 쉽고, 소작인들이 많아 의병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를 비롯하여 '頭可斷髮不斷'을 외치며 조선선비의 절개를 보여준 면암 최익현이 전라도 곡성땅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린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호남 차별과 박대, 멸시와 조롱은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호남인들은 은혜와 원수를 구별하여 가슴에 담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은혜도 잊지 않고 원수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갚을 건 갚는다는 사람들이니, 호남인들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것이 골수에 맺힌 한에 얽힌 문제라면, 그로 인해 발생할 비극은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
한(恨) 많은 가슴에 공산주의가 접목된 지금이 염려하는 그때일지 모른다. 수많은 주사파들과 이적단체 범민련, 그리고 북에 협력하는 민노총을 비롯한 간첩들과 5.18유공자로 몰려든 좌파들과 거기에 목숨줄을 걸고 사는 사람들 대부분 전라도 출신임을 바라보고 있다. 광주지하철에 무임승차하는 이들이 전체승객의 1/3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호남사람들의 대한민국을 향한 완고한 저항은 망국의 모습이다. 논리가 사라지고 네 편 내 편을 가른 진영논리에 휩싸인 곳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마저 흐려진 곳이 호남이다.
아무리 애원해도 풀어질 까닭이 없는 이곳에 문재인은 달콤한 꿀을 많이도 발라주었다. 국군 삼군 참모총장은 물론이고 선관위 같은 곳도 크고 작은언론사에도 호남인은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정부 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풍족한 예산으로 정율성 같은 중공군 기념비까지 세울 수 있었다. 이 달콤한 맛에서 손을 뗄 수가 있다고 보는가.
지금 호남인들은 정권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뭉쳐져 있다. 그러니 합리를 바랄 수 없다. 오직 타지역에 대한 배척과 호남인의 단결만을 외치고 있을 뿐이다.
2024. 1, 27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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