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수 칼럼] 윤석열의 잘못은 무엇인가
이국영 기자 | 입력 : 2024/04/22 [12:15]
윤석열의 잘못은 무엇인가
언론에서 조국이나 그 당을 너무 띄운다. 12석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민주당이 독자적으로 이미 과반을 넘었고, 12석을 더한다고 해도 2/3가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거론조차 할 가치가 없다. 12명의 의원은 사꾸라(さくら)에 불과하다. 일본어의 원래 의미는 ‘바람잡이’다. 연설에서 박수를 유도하거나 연극에 분위기를 돋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람잡이도 때로는 엉뚱한 회오리를 일으킬 수 있다. 더구나 계륵(鷄肋) 같은 입장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려면 억지를 부리거나 극한 상항으로 치달을 수 있다.
조국은 이미 이른바 ‘사회연대임금제’라는 이름으로 권력이 민간 기업의 임금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괴상한 주장을 한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회의원의 국회 회기 중 골프 금지와 국내선 항공 비즈니스 탑승 금지 등을 제시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비즈니스를 타고 불가피했다는 변명의 토를 달았다.
국회의원, 회기중, 국내선이라는 단서를 두었지만 결국은 국민들에게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하지만 일부의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이른바 7계명 중의 마지막 계명이다. 주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움켜쥔 돼지가 모든 동물들에게 적용하려고 선포한 계명이다.
원래의 계명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All animals are equal) 였는데 여기에 “일부의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는 단서를 추가한다.
여기에서 더욱 평등한 일부 동물은 권력을 쥔 돼지들을 의미한다. ‘평등’은 그 한마디로 다 똑같다는 의미다. 따라서 “더욱 평등하다”는 말은 불필요하고 성립될 수도 없다.
결국 이 말은 소련의 권력자들이 말하는 평등은 인민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특권과 권위를 누리면서 이를 정당화하려는 개념적 조작에 불과하다.
특히 이 계명은 권력자들이 인민들에게 허구적인 평등감을 조성하기 위해 어떻게 언어를 조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의 좋은 예다.
이번에 조국이 이런 흉내를 내고 있지 않나. 진보주의들이나 공산주의증후군자들은 ‘평등’에 열광한다. 국민의 권리와 선택권을 제한하는 주장들은 바로 이런 세력들에게 영합하려는 술책이다.
개인기업의 봉급이나 비행기 의자까지 국가가 관리하는 지경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동물농장의 돼지들처럼 모든것이 통제되지 않을까. 인구장려책으로 과거 스파르타처럼 부부교환제나 또는 출산목표를 정해주고 부부관계의 하한선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평등’을 구현하는 방법은 “처방적 평등”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장애인, 노인, 여성, 영세민 등에 대한 우대정책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진보 및 공산주의자들은 기계적 평등을 통해서 결과적 평등을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더 평등한 어떤 동물” 즉 특권계급들이다.
내가 선거전부터 줄기차게 이야기한 것은 진보가 득세하면 결국 자유민주주의가 훼손되며 시장경제의 지축이 흔들리고 한미동맹이 훼손되어 북한의 남침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조국의 비례정당이야 단 12석뿐이니 책임은 뒷전이고 이말 저말로 진보세력의 환심을 사려고 들것이다. 여기에 민주당이 이에 질세라 한 걸음 더 나가다 보면 공산주의의 본모습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윤석열정권이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이념과 결연히 맞서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 결과가 경악할 정도로 초라하게 나오자 언론과 함께 여당도 그 화살을 윤석열정부에게 돌린다.
언론과 야당은 물론 여당 마저도 윤대통령의 불통을 꺼낸다.
야당 대표는 피의자로 재판을 받고 있다. 법조계의 의견은 재판의 종착역은 감옥이다.
그럼에도 야당과 언론은 대통령보고 재판 받고 재판의 종착역은 구속이라는 피의자를 야당대표라는 이유로 이른바 “영수회담”을 하라고 한다.
이런 피의자와 만나서 회담을 하는 것은 협치고 만나지 않은 것은 “불통”이라는 의미라면 국어사전을 바꾸어야 하지 않나.
왜 야당은 윤대통령에게 협치와 소통을 요구하면서 정정당당하게 대통령과 회동할 수 있는 다른 인물을 내세우지 못하는가.
대통령이 추천한 국무의원이 야당에 의해 거부된 것을 대통령이 합법적으로 임명한 것이 독선이고 오만이라면 대통령의 임명권은 무엇인가.
총선에서 야당이 정권심판론을 제기했지만 구체적으로 심판할 정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윤대통령을 할퀴고 헐뜯는 정치적 선전선동이 아니었나?
야당은 윤석열정권의 핵심정책인 자유시장경제체제와 한미동맹 강화 및 북한의 책동에 대한 단호한 대응에 관련한 정책을 어떻게 평가했고 대안은 무엇이었는가.
윤대통령은 참패의 와중에서도 이런 보수의 가치에 대해 흔들림 없는 자세를 보여주어 다행이다.
일부 진보언론은 몇 사람의 시민을 등장시켜 대통령의 상황인식이 달라지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보수의 핵심가치를 포기하라는 말인가? 물에 빠진 나그네를 건저놓으면 보따리 찾아내라고 역정이다. 옷고름 풀면 고쟁이 벗으라고 안달이다.
보수가 진보가 되어야 만세를 부르지 않겠나.
물론 윤대통령의 리더십은 어떤 면 특히 인사문제에서 한심하다.
야당이 인사청문회에서 비토를 놓으면 저렇게 훌륭한 인물을 왜 물고 헐뜯느냐는 국민의 원성이 빗발칠 인물을 찾으려고 노력했나.
혹자들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망사(忘死)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전반적으로 인재풀의 빈곤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투표한 인물이 3천만명에 달한다. 사람을 고르는데 이 3천만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1/10인 300만 아니면 그 1/100인 30만 더 줄여서 1/1000인 3만명, 더 줄여서 1/3000인 1만명을 훑어 보았는가. 1만명은 고사하고 눈을 구정권관료와 검사외에 얼마나 찾아보았나.
윤석열식 인사는 새부대에 헌 술을 담는 안일함으로 국민들의 손가락질을 당했고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식상함으로 윤정권에 대한 밥맛을 잃게 만들었다.
도대체 사람을 그렇게 못 찾나 안 찼나. 그렇다 보니 오히려 피해야 할 인물을 안방으로 끌어들인다.
파스칼은 "강이라는 국경을 놓고 강 이 쪽에서는 충신이 강을 건너면 역적이 된다"고 갈파한 바가 있다. 기껏 거명되는 인물들이 이런 인물들 아닌가.
과거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의 사람들이 국민의힘이나 윤석열정권에 붙어있는 것은 민주당입장에서 배신자다. 이런 사람들은 불러도 오지 말았 어야 한다. 오는 사람일수록 권력만 탐하는 찌질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이 여전히 하마평에 오른다는 것은 윤석열정권이 아직도 비몽주몽(非夢酒夢)중에 방향감각이 상실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번에 언론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명박과 박근혜정권에서 시위(尸位)에 앉아 소찬(素餐)이나 챙기던 인물들을 연달아 앉혀 놓고 이들 간에 뺑뺑이를 돌리니 국민들이 얼마나 구역질이 나겠는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면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갖춘 천하의 인제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 질질 매는가.
이번의 국민의힘 공천도 마찬가지다. 한번 관직에 앉았으면 후진을 위해 비켜설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지역구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라도 출마를 해야 하니 어느 명의(名醫)인들 이병을 고칠 수가 있겠는가.
고대 아테네에서는 추첨으로 한번 공직을 맞게 되면 1년 임기에 평생 한번이었다. 그렇더라도 아테네는 인류역사에 최초의 민주주의와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윤석열대통령의 이런 비판요소들이 선거패인의 유일한 요소하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배경은 아주 미세한 요인이라고 본다. 실제 원인은 따로 있다.
그러면 진짜 패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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