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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칼럼] 전두환은 위대한 대한민국 영도자(領導者)였다 (들어가는 말~lX)

최지정 기자 | 기사입력 2024/11/11 [12:38]

[정재학 칼럼] 전두환은 위대한 대한민국 영도자(領導者)였다 (들어가는 말~lX)

최지정 기자 | 입력 : 2024/11/11 [12:38]

전두환은 위대한 대한민국 영도자(領導者)였다

- 전두환은 노벨평화상 후보였다 -

 

 

본문이미지

 

                                         정재학 시인.칼럼니스트 

 

‘1988년 3월 3일 일본 교도통신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영국과 서독의 유력의원들에 의해서 올해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고 일본 교토통신이 오늘 보도했다.

 

교토통신은 유럽 의회 관계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이유로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며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고 대통령직을 떠난 점도 추천 이유에 포함됐다고 밝혔다.’

 

◈ 들어가는 말

 

곧 전두환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11월 23일이 돌아온다. 그리하여 전두환 대통령을 생각할 때마다 만감이 교차되는 것은 필자만은 아니리라 믿는다. 필자(筆者)는 전두환 그분만큼 사실과 다른 평가를 받는 분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민주당과 5.18 세력들에 의해 살인마라 난도질 당하는 분이라 믿기에 더욱 안타까운 심정이다. 따라서 반드시 전두환 대통령의 억울함을 풀어야, 대한민국 근대사가 완성된다고 믿고 있다.

 

6.25 이후 대한민국 국시 제1호 반공(反共)은 절대의 가치이자 통치이념이었다. 바로 이 통치 이념을 무너뜨리기 위해 좌익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라 매도하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임헌영의 민족문제연구소가 나서서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아붙일 때, 대한민국 내부에 기생하는 종북주의자들은 너나없이 이를 거들고 나섰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을 수치스러운 제물로 만들어서 민주화의 제단에 올리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우리 애국우파는 이를 부정하는 팩트와 칼럼을 공개하면서, 동의하는 국민들이 늘어났고, 이젠 민주당 좌익들도 이승만과 박정희 두 분의 진실을 부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은 오랜 치욕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은 그 명예를 회복하고 있다.

 

그렇듯 전두환 대통령도 5.18 세력들이 민주화운동의 제물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건 민족의 가슴에 죽창을 꽂아넣던 과거 빨갱이들의 잔인한 처형을 연상케 하는 일이었다. 관용이 없는 매도였고, 진실을 뒤엎은 역사의 반란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살인마가 되었다.

 

전두환이 살인마여야 만이 좌익빨갱이들의 입지가 공고해진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5.18 세력들이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 바로 ‘살인마 전두환’으로 몰아붙이는 일이었다. 더 나아가 좌익들이 대한민국 정국(政局)을 지배하기 위해선 이유를 불문하고 전두환은 살인마가 되어주어야 했다.

 

5.18을 이용하여 부(富)와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좌빨들과 가짜 민주화유공자들의 음모는 집요했다. 그들은 5.18 묘지 입구에 전두환 비석을 놓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어리석은 민중들은 전두환 비석을 밟으면서, 전두환을 저주하는 만큼 5.18을 높게 우러러보았다.

 

그만큼 전두환과 5.18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증명한다. 따라서 전두환의 진실을 풀어내야 5.18의 가짜역사도 풀어낼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또한 전두환 대통령을 버려두고 5.18을 해결하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짓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이후로 전두환 대통령이 이룩한 영도자(領導者)로서의 업적은 묻혀지고 사라졌다. 오히려‘살인마’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심지어 그 분의 마지막 유언대로 북녁땅이 보이는 휴전선 어느 곳에 묻히지도 못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장례식 때도 장례식에 찾아가 명복을 빌어주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민주당과 민주당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5.18 세력들에 의해 죽음마저 거부된 것이다.

 

이에 필자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알려, 그 분을 살인마라는 불명예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이는‘역사 바로세우기’와 같은 맥락이다. 오늘날 자주국방과 부흥하는 경제를 보면서, 전두환 대통령은 살인마일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전두환 대톹령을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처럼 명예를 회복하여, 자랑스런 선진대한민국을 이룬 위인(偉人)으로 평가받게 해야 한다고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부족하지만 온힘을 다하여 전두환 대통령의 진실을 알리고자 한다.

 

(이후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생락하오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전두환은 살인마가 아니다 -

 

오랜 의문 하나가 있었다. 40년이 된 이 해묵은 의문은 아직도 살아있는 생물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화석(化石)이 되어 아픈 추억의 강을 건너고 있어야 할 광주에 관한 일이다.

 

필자(筆者)는 그 의문을 끄집어내어 세상에 내놓는다거짓과 진실의 차이를 극복하여해묵은 고민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광주의 진실이 가식(假飾)을 벗는 날우리의 세상은 지금보다 맑게 개리라 믿는다.

 

하나의 도시가 총기로 무장한 시민들에 의해서 점거되어 행정부터 치안까지 국가적 통제가 사라져버렸을 때그걸 두고 보고만 있을 나라가 있을까또한 그런 사태에 대해 희생을 염려하여 수수방관만 한다면그게 국가일까만약 내가 지도자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옳았을까.

 

1980년 광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지금도 진화되지 않고 석고처럼 굳어져 있다우리는 굳어진 고형(固形)의 광주를 녹여내어서 진실을 조각해야 한다거짓이 위대함으로 포장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명쾌한 답변을 한 이가 있었다정치인 박지원이다그는 전두환의 5.18 조기 진압을 '위대한 결단'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피해를 최소화하고조기에 진압하여광주를 빠른 시간 내에 정상으로 회복했다는 뜻에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는 전두환을 국민을 죽인 살인마라고 부른다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것이다이 두 개의 시각은 지금까지도 국민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비극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대한 결단과 살인마사이의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국민은 사건의 원인부터 결론까지 통일된 하나의 결론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세상은 밝아지고 분열로 야기된 불행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筆者)는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보지 않는다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계엄령을 내렸다 하여도총기로 무장한 시민들이 장악한 광주에 계엄 외에 무슨 방법이 있었겠는가.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한다면광주와 광주시민들은 선량한 피해자였어야 한다그러나 무기고를 털어 수많은 시민들이 총기로 무장했다는 점은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지금도 무기고를 털어 시민들을 무장시킨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뜻있는 광주 어른들이 총기반납을 설득했어도이에 불복하며 끝까지 총을 손에 놓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는 선량하다 표현할 수 있을까.

 

전두환이 살인마라면총기무장한 시민들에 의해 죽은 국군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그렇다면 총을 쏜 광주시민들도 살인자가 아니겠는가.

 

교도소 습격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6회에 걸친 교도소 습격이 습격에 참가한 대부분은 교전 끝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교도소엔 다수의 흉악범과 인민공화국에서 전향하지 않은 비전향장기수들이 있었다교도소를 습격하여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 것이 과연 옳았을까이때 사망한 사람들을 놓고전두환을 살인마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신군부의 강경진압을 거부하고 시민들을 보호하던 경찰들이 있었다그 경찰들을버스를 탈취하여 치여 죽인 행위를 과연 민주화운동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도청에 폭탄을 설치하고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시민들그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여 피해를 줄인 계엄군피해를 최소화시킨 이것이 과연 살인마의 행위라고 단죄할 수 있을까.

 

그 후 오래도록 광주는 비극의 문을 닫고 침묵하고 있었다전두환은 단임 약속을 지키고 집권 7년을 끝으로 물러갔다비극의 문은 현장의 통곡소리와 함께 열렸다국민적 동정이 쏟아지고 전두환은 국민적 요구에 의해 법정에 섰다.

 

그 와중에 광주의 추한 모습들도 덮여졌다그리고 그들은 이상한 유공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북한 침공시 이에 호응하여 국가기간시설들을 파괴하고자 한국가 전복을 꿈꾸던 이석기 같은 이들이 유공자로 등극하였다.

 

엄청난 일시보상금과 매달 연금으로 얼마가 주어지고 있는지 모른다심지어 광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해찬한명숙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이렇게 광주는 국민적 동정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

 

박지원은 5.18특별법을 발의하였다. 5.18을 비판하는 자에 대한 처벌을 담은 법이었다한마디로 5.18성역화를 꾀하고자 한 법이었다신성불가침이었다. '위대한 결단'에서 전향하여 5.18에 신성불가침을 부여하고자 한 정치인 박지원.

 

그리고 가짜유공자의 존재를 알게 된 국민들그 국민들의 시각이 싸늘하게 변해 있음을 광주만 모르고 있는 것일까광주가 그 정당성에서 멀어진 오늘왜 그들은 5.18을 놓고 있지 않은 것일까전두환을 살인마라고 해야 그들의 가짜유공자들이 무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전두환을 욕하고 비판해야 가짜유공자들은 5,18 혜택을 죽을 때까지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가짜유공자 문제는 광주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히고 있다아무리 전두환을 욕해도 광주는 도덕적 신뢰를 상실한 지 오래다.

 

조작된 진실은 사라져야 한다전두환은 살인마가 아니라 박정희 사후(死後혼돈으로 나라가 흔들릴 때흔들리는 대한민국을 바로잡고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영웅이었다그리하여 스스로 총대를 메고 살인마의 누명을 무릅쓰고국난을 극복하며 불행한 시대를 이겨낸 위인이었다 믿는다.

 

전두환과의 재회(再會)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는 민주주의를 파르헤지아 실천의 조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영어로 ‘Free Speech’로 번역되는 파르헤지아, ‘두려움 없이 진실 말하기를 의미한다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처벌이나 후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는 지금 진실을 말하기가 두려운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지금 그대는 전두환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진실을 말하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사회라면그 사회는 미래가 없다지금 우리는 그런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정의는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지키고자 하는 것이 진실과 올바름이라면 정의는 칭송과 위대함의 화려한 옷을 입는다그러나 정의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거짓과 불의(不義)라면정의는 역사를 짓밟는 가혹한 폭력이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입에 올리는 자들은 두 개일 수 없는 진실을 말한다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진실은 두 개로 나뉘고 있다따라서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용기즉 정의도 두 개일 수밖에 없다그리하여 모든 사실에 대한 평가나 판단도 두 개로 나뉜다.

 

그 중의 하나가 전직 대통령에 관한 평가다예를 들면 전두환을 보자누군가는 전두환을 살인마라 평가한다그러나 누군가는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호황을 이끈 지도자혹은 이 시대 민주주의를 이끈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내린다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평가라 할 것이다.

 

현 대한민국이 극심한 가치혼란에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누군가는 끊임없이 전두환을 저주하고 있었고누군가는 전두환 시대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전두환에 관한 한 무엇이 진실인가에 답을 내려주어야 한다이러한 혼란을 정리해야만이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진실을 가려내는 밝은 눈이 필요하고그리고 가려낸 진실을 지키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그 용기를 우리는 정의라 말할 것이다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 두려운 사회에서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진실을 알면 속지 않는다전두환이 이름은 가장 혐오를 받고 있는그리하여 가장 안타까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끈 상징적인 인물일 것이다전두환도 대한민국의 국운 상승을 위해그리고 그 영광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기에그에 대한 진실만큼은 밝혀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예노동자들과 정치권을 에워싼 진보좌파, 5.18세력들은 전두환을 끝까지 살인마라는 이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짓밟고 있었다.

 

좌파들로서는 그렇게 짓밟고 능멸해야만이 진보를 상징하는 집단들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일이라 믿었을 것이다더욱더 전두환과 박근혜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이후로도 진보의 장기집권을 위한폭력적인 그들의 행위와 존재 가치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것이기에무려 1981년 12대 대통령이 취임 후 무려 40여년이 지나간 지금까지 전두환을 놓아주지 않는지 모른다.

 

이에 필자(筆者)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미래를 위해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풀어내지 않고는 그 무엇도 온전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비교를 하자면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끝없이 반대를 일삼던 두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민주화 투사로 알려진 김영삼과 김대중이다이 두 인물들도 모두 대통령이 되었다.

 

이 두 인물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었느냐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하나는 나라 경제를 망쳐 IMF 시대를 열었고또 한 사람은 북핵을 완성 시켜 오늘의 비극을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아직까지 민주화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아직도 광주와 호남은 김대중의 생일날을 성인의 탄신일처럼 기리고 있다지나친 행위일 것이며조소(嘲笑)를 받을 일이다.

 

만약 전두환 이후 직선제 대통령제에서 노태우 대신 이 두 인물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철강왕 박태준은 김영삼의 인물됨을 이렇게 말한다.

 

김영삼은 한 시간만 대화를 나눠도 인물의 밑천이 보인다.”

 

한 마디로 대통령 욕심만 잔뜩 들어있지국가경영에 대한 비전과 지혜와 경륜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김대중은 더 일찍 북한 경제의 회생과 북한 핵개발을 위해전두환이 이룩한 경제성과물을 북으로 보냈을지 모른다.

 

역사는 오늘에서 평가와 결론을 내린다우리는 오늘의 상황즉 현실의 상황을 파악하여 교훈을 추출한다그리고 그 교훈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 나아간다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시대는 우리가 바라는 역사가 아니다. IMF로 각인된 민주화 투사 김영삼북한 핵개발로 이어지는 김대중 시대는 깊이 묻어야 할 오류의 역사일 수도 있다우리의 미래로 연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민주화는 목표가 아니다민주화는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밑받침하는 도구적 이념일 뿐이다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어떤 이념을 막론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여 역사의 수치를 씻어내는 한편고토(古土)를 수복하여 강한 민족 강한 나라가 되어 민족의 영광을 재현하는 일이다전두환은 그 길을 걸었던 40년 전의 위인(偉人)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침묵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스티븐슨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잔혹한 거짓말은 침묵 중에 말하여진다.’

 

그대가 진실에 대하여 입을 닫고 있을 때전두환에 관련된 역사는 그릇되게 평가되고이로 인해 세상은 민주당 좌빨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잘못 굴러간다는 뜻이다.

 

- 2. 진실의 다면을 위하여 -
 
Ⅱ. 진실의 다면(多面)을 위하여
 
1980년대 우리는 전두환 전(前) 대통령을 ‘돌’이라 불렀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지적인 풍모가 없는 담담하게 생긴 그의 외모와 벗겨진 머리, 그리고 이름 두환에서 ‘두’를 연결시켜 ‘돌’이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그의 이미지는 정말로 ‘돌’이었던 것 같다. 돌처럼 강하고 돌처럼 우직하고 돌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 전두환은 처음과 끝이 변함없이 한결같은 성격의 위인(偉人)이었다.
 
그처럼 전두환은 솔직담백한 성격을 지닌 무인(武人) 기질의 대통령이었다. 만약 모든 것을 제쳐두고 성격만으로 역대 대통령을 평가하라면, 전두환은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백담사로 보낸 노태우의 병문안을 간 사람이었고, 사형선고를 내린 김영삼의 장례식에 찾아갔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의 장례식 때도 변함없이 예의를 갖춘 인물이었다. 사내대장부답게 털 것은 털고 가는 그는 의리 또한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런 그가 ‘살인마’라는 잔인하고 야비한 인간으로만 비춰진다는 것은 좌파의 소설적 각색이 동원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그가 정말 잔인하고 야비한 인간이라면 아웅산 테러를 당하고난 후, 북을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적(政敵) 김영삼과 김대중을 어떤 식으로든 처치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일반의 정치인들처럼 거짓말로 남을 현혹시키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는 사내대장부였고, 세상을 솔직담백한 시각으로 보는 남자였다. 세월호 사건 이전에 목사 유병언이를 위험하게 보고 거부한 사람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이러한 성격의 전두환은 우리 현대사에서 인상 깊은 두 가지 위대한 업적을 쌓아놓은 대통령이었다. 그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작한 ‘한강의 기적’을 이어받아 경제를 완성한 일이고, 또 하나는 대통령으로서 7년 단임 약속을 실천하여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일이다. 이 평화적 정권 교체가 바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영국과 서독의 정치인들은,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 한 점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고 대통령직을 떠난 점을 들어, 전두환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노벨위원회에 추천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여느 독재자처럼 일신(一身)의 영화와 안녕만을 바란 사람이었다면, 이 두 가지는 실현될 수 없는 주제였을 것이다. 어느 독재자가 나라와 민족의 풍요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경제에 집중했을 것인가. 그는 스스로를 무식한 자라 인정했다. 그리고 경제전문가에게 이 모든 일을 맡겼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나도 배우겠다. 당신들은 마음 놓고 경제를 완성시켜라.”
 
참으로 전두환다운 단순솔직한 리더쉽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두환은 임기 중 우리나라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경제학자들은 전두환 시대를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였다’는 평가를 한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전두환은 단임 약속을 지켰고 그리고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으며,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현재 윤석열까지 무려 7대에 이르는 6공화국의 기초를 닦았다.
 
만약 전두환이 권력에 취하여 정권 연장을 꾀했다면,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가의 판단이다. 그만큼 그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집회에 철퇴를 내렸을 만큼 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6.29 선언 당시 측근들은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두환은 계엄령을 내리지 않았다. 취임 초 ‘두 번 다시 군을 동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선호하던 내각책임제에서 직선제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리하여 전두환이 만든 헌법으로,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까지 7명의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윤석열정부가 제6공화국 7기임을 명심해야 한다.
 
필자(筆者)는 이 두 가지 면에 초점을 맞추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바르게 잡고자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전두환에 대한 ‘살인마’라는 일반의 평가를 거부하는 나의 반론(反論)은 오로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이 두 개의 각각 다른 평가에 대한 문제를 풀지 않고는 대한민국은 과거의 족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미래 또한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단면(單面)만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없다. 하나의 평면(平面)으로만 존재하는 존재는 절대 없다. 존재하는 사물의 절대성은 다면이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물과 인생,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까지,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면적이며 입체적이다. 앞과 뒤가 있으며 위와 아래가 있고 측면이 있다.
 
그리하여 그대가 그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를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한 면에서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저 뒤편의 것까지 살펴볼 줄 알아야, 우리의 판단은 올바른 길을 가게 된다.
 
코끼리의 다리만 보고 기둥이라 주장하는 오류는 편견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편견은 분열과 오해와 악(惡)을 조장한다. 편견은 선입견을 발생시킨다. 자신의 시각과 판단을 버리고, 누군가의 판단에 좇아가는 것. 어떤 선입견에 의해 자신의 시각과 판단을 버리는 것도 악(惡)을 지원한다. 그러므로 편견과 선입견 모두 올바른 판단과 진실에 반(反)하는 악(惡)이다. 전두환을 바라보는 그대의 시각이 이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전두환 전(前) 대통령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도 편견에서 출발한다. 5.18 당시 시민군을 향해 사격명령을 내린 자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하여 ‘살인마’라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 역시 단면만을 바라본 편견이며 오류이다.
 
전두환, 그는 자존심 강한 무인(武人)이다. 그는 직선적이고 단순솔직한 사람이며, 의리를 철칙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이다. 끝까지 충성을 다한 장세동이란 인물에게서 보았듯이 그는 의리를 무엇보다도 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그의 성격상 사격명령을 직접 내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사격명령은 당시 도청 앞에서 버스를 몰아 경찰관을 살상(殺傷)을 한 사건 이후 위협을 느낀 현장 지휘관들이 내린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대법원도 그렇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다만 총기가 탈취되고 시민군들이 무장을 한 이후, 교도소가 습격을 당하는 등 광주가 무정부사태에 빠졌을 때부터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수뇌부에서 진압을 위한 사격명령을 내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전두환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5.18뿐만이 아니라 다면(多面)에서 찾아야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역사엔 편견이 없다. 역사 역시 인간처럼 입체적인 존재이며, 주관이 아니라 객관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역사는 다면의 평가를 통해 진실을 기록한다.
 
헤겔은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은 두 번 반복한다고 썼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반복한다고 하였다. 이제 전두환 전(前) 대통령도 비극에서 일어나 희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의라고 필자(筆者)는 굳게 믿는다.
 

전두환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영도자였다

 

북한의 도발과 국난극복

 

우리 정치사에서 전두환의 등장은 정말 운명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고 난 뒤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대처한 이가 전두환이었다보안사령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범인 김재규를 체포하는 일이었다.

 

김재규 체포 후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에 오른 최규하그러나 전두환은 최규하가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무려 4시간이나 침묵을 지킨 점을 주목한다김재규와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이에 전두환은 신현확 전(총리를 찾아가 대통령직 수행을 요청하였고이 제안을 신현확 씨는 거절한다.

 

결국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스스로 정권을 잡기로 결심한다그것이 12월 12일에 있었던 12.12 사태이다전두환은 처음부터 정권을 잡고자 하지 않았다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안 즉시 당시 영부인 직을 수행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남긴 말또한 전두환의 뜻과 다르지 않았다박근혜가 남긴 말은 북한의 도발을 걱정한 전방(前房)은요?“였다부친의 사망보다 국가 안보를 먼저 생각한 발언이었다.

 

전두환 역시 국내 혼란을 극복하고 북한의 도발과 침투를 막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했다최규하는 믿을 수 없고신현확 씨는 거절하는 상황그렇다고 해서 김영삼과 김대중 씨에게 정권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그동안 양(김 씨가 보여준경부고속도로 반대부터 사상적 행보까지전두환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리하여 전두환이 우리 정치사에 등장한 것이었다. ‘차라리 우리가 나라를 맡자는 것이었으니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에 서려있는 내면의 진실까지 흉측한 내란음모로 처단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유럽 의회 관계자들이 전두환 전(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한 첫째 이유가 바로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이었다바로 이 점은 전두환에 대한 진실 중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안정보장상의 이유란 북한의 도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그러니까 전두환은 재임기간 중 수없이 자행된 북한의 도발에 대해군사적으로 응징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했음을 의미한다전두환의 7년 치적 행간(行間속에서 두고두고 곱씹어 볼 만한 부분이다그는 독재자가 아니라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던가.

 

북한을 빼놓고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설명할 수 없다모든 반()대한민국 시위나 집회 역시 북한을 제외하고는 설명이 안 된다. 5만 간첩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행동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그 간첩들이 무엇을 획책하고 선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일 수 없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북한의 무력도발과 간첩 테러를 정면으로 맞서 싸워왔다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시대 역시 북한과 대결 속에서 온갖 도발과 간난과 신고의 과정을 겪으며 이루어낸 성과물이었다.

 

한 손으로는 맞서 싸워야 하고한 손으로는 경제를 일으켜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다시 말하면대한민국의 경제적 부흥은 북한이라는 적과 싸우면서 일으킨 위대한 업적이라는 점이다북한이 우리 대한민국에 자행한 도발은 1953년 휴전 이후 무려 40만 건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전두환 시대의 배경 속 1970-1980년 대 일어난 북한의 도발을 시간의 흐름대로 간추려 본다조금만 살펴보아도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었는지우리 대한민국이 어떤 국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1970년부터는 화전양면전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해불리한 상황에서는 대화를 주선하는 한편 비무장지대를 은밀히 침투할 수 있는 땅굴을 굴착하기 시작했다반대로 유리한 상황에서 반드시 무력을 동원했다이해를 돕기 위하여 1970년 이후에 발생한 북한의 도발을 대표적인 것만 추려본다.

 

•해군 방송선 I-2 피랍 사건(1970.6.5) [6]

현충문 폭파 미수 사건(1970. 6. 22)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1971. 1. 23)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사건(1971. 6. 1)

철원군 비무장지대 총격사건(1973 .03. 07)[7]

추자도 무장공비 침투사건(1974. 5. 20)

해경 863경비함 격침 사건(1974. 6. 28)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1974. 8. 15) - 육영수 여사 서거

휴전선 남침용 땅굴 발견 사건(1974. 11. 5 등 1990년까지 총 4차례)

헨더슨 소령 사건(1975. 6. 30)

판문점 도끼만행사건(1976. 8. 18)

광천지구 무장간첩 침투사건(1978. 11. 4)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1978. 1. 14, 1978. 7. 19 순차적으로 납치)

 

전두환 집권 1980년대에는 주로 테러를 이용한 도발을 시행했는데범위를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제3국에서 실행해 테러의 주체를 알지 못하게 위장하려고까지 했다.

 

•필승교 무장공비 침투사건(1981. 6. 29.)

SR-71 정찰기 피격 사건(1981. 8. 26.)

저진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1982. 5. 15.)

임월교 무장공비 침투사건(1983. 6. 19.)

월성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1983. 8. 4.)

독도 근해 간첩선 격침 사건(1983. 8. 13.)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1983. 10. 9)

다대포 침투 무장공비 매복 생포 작전(1983. 12. 3.)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사건(폭탄 투척 사건)(1983. 9. 22.) - 체포된 공비 진충남과 이상규의 증언에 따른 발표.

청사포 간첩선 격침 사건(1985. 10. 19.)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1986. 9. 14.)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1987. 11. 29)

 

이 중에서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86아시안게임과 서울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테러였다.

 

특히 아웅산 테러는 북한 테러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폭파사건으로,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사고 당시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나라를 일으킬 유능한 인재들은 이렇게 북한의 테러에 의해 꿈을 접고 산화(散華)하였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외무부장관 이범석(李範錫), 상공부장관 김동휘(金東輝), 동자부장관 서상철(徐相喆),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金在益), 재무부차관 이기욱(李基旭), 주 버마대사 이계철(李啓哲),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河東善),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閔炳奭), 농수산부차관 강인희(姜仁熙), 과학기술처차관 김용한(金容澣),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李載寬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李重鉉), 경호원 한경희정태진 등도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李基百), 공보비서관 최재욱(崔在旭), 외무부 의전국장 최상덕(崔尙德), 한국일보 기자 윤국병(尹國炳), 중앙일보 기자 송진혁(宋鎭赫), 동아일보 기자 최규철(崔圭徹), 연합통신 기자 김기성(金基成), 코리아헤랄드 기자 김기석(金基石), 연합통신 사진부장 최금영(崔琴煐), 문화공보부 직원 임삼택(林三澤김상영(金相榮), 경호원 김상태 등이었다.

 

김포공항 폭탄 테러 사건은 1986년 9월 14일 김포국제공항 청사 앞에서 의문의 폭발물이 폭발하여 5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을 5일 앞두고 발생하였다아시안 게임을 방해하려는 북한의 테러였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Korean Air Flight 858 Bombing)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858(KE858),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대한항공 보잉 707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공중 폭파되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하였고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객기 폭파 후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일으킨 최대의 항공 테러였다이 사건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8년 9월까지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이외에도 북한은 끊임없이 간첩과 무장공비를 남파시켰고(대한민국 활동 및 반(정부활동을 진행시켜왔다전두환은 이런 국난을 딛고북한과 맞서 싸우는 한편 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도약 발전시킨 것이다.

 

경제의 도약과 부흥

 

만약 전두환 전(대통령이 아웅산 태러 즉시 북한과의 전쟁에 돌입하거나 복수를 선택했더라면대한민국 경제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전두환은 보복보다는 경제를 선택한다필자(筆者)가 전두환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전두환은 어떤 문제를 만나거나 난관에 부딪혔을 때상황을 피해 우회적으로 돌아가거나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다그는 직선적인 사람이며어떤 험로(險路)를 만나더라도 주저 없이 그대로 돌파해버리는 무인(武人)다운 추진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는 경제가 위기에 있음을 알자주저 없이 경제 돌파에 돌입(突入)하였다그것은 고지를 향해 온몸을 그대로 던져버리는 처절한 군인의 모습이었다몰려드는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오직 목표하는 한 점만을 바라보는 집중과 투지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그리하여 전두환그는 최선을 다한 뒤 결과에 결코 후회하거나 자만하지 않는 대통령이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직에 오르면서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그 첫째가 경제 발전이었다두 번째가 단임에 대한 약속을 실천하여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루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전두환은 경제라고는 봉급 봉투 한번 만져보지 않은 청맹과니 문외한이었다군인 출신의 전형적인 무인(武人)으로서 오직 군 전략과 전투로만 단련된그 외에는 아무런 지식도 능력도 취미도 없는 사람이었다다만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였을 뿐이다그는 그를 보좌하는 김재익(아웅산 테러에서 사망)을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그러니 나는 여러분을 믿고 경제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맡긴다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여러분은 소신껏 마음 놓고 일해 주시기 바란다.”

 

전두환은 이런 말로도 김재익을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을 응원하였다.

겅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참으로 어렵게 시작해 놓은 경제였다경제발전에 쓸 씨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월남 파병 군인들의 월급까지 경제 건설에 동원될 정도였고한일회담을 통해 받은 배상금으로 겨우겨우 경부고속도와 포항제철을 만들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주 어렵게 마련한 아주 적은 재화(財貨)를 어디에 집중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의 꿈과 결단에서 시작되는 일이었다박정희 대통령은 그 일을 해낸 위대한 지도자였다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경제라는 이 어려운 목표를 이루어 나갈 때나는 야당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 하나가 있다비록 진위(眞僞)가 불분명한 사진이지만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고자 경부고속도로 공사판 위에 누워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사진이다김영삼 김대중 측 둘 다 부정하는 사진이지만그러나 이 사진은 경제건설 반대를 의미하는 상징성에서만큼은 의미가 분명한 사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시대에 이르러서도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았고 야당의 반대도 극심한 시절이었다전두환은 1980년 9월에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등용한다.

 

김재익은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다짐을 받아들이고 김재익을 신뢰할 것을 약속했다전두환이 '경제에 관해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한 말은 바로 김재익에게 한 말이었다전두환은 김재익에게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그리하여 경제에 관한 한 그 누구도심지어 3(허삼수 허문도 허화평)조차도 김재익을 방해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그들로부터 김재익이 괴로움을 당하자전두환은 격노하면서 허화평·허삼수 두 허씨를 청와대에서 내보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그만큼 전두환은 경제를 최우선 절대선의 과제로 삼았다.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입각한 뒤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전두환은 자신이 경제학경영학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김재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새벽까지 강의를 들었다김재익은 하얀 종이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까지 그리면서 전두환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전두환은 김재익의 경제경영학 강의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갖게 됐고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경제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리하여 그의 시대, 5공 초기 벼랑 끝에서 시작한 경제는 전두환 집권 불과 몇 년 사이에 유례없는 호황으로 발전하였다각종 경제전망은 기분 좋게 어긋났고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물가까지 안정되었다성장·물가·국제수지라는 이른바 ‘3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던 것이다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바로 30년 전(전두환 통치시대의 이야기이다.(그러나 이 모든 성과에도 불구하고그 김재익은 아웅산 테러 현장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전두환은 경제를 물가 안정부터 시작하였다그리고 김재익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화학공업 통폐합 등 각종 개혁 작업을 강행했다오일쇼크에 심한 흉작이 겹쳐 물가가 폭등하고 민심은 흉흉한 시절이었다한 자릿수 물가안정정책을 군사작전 하듯 밀어붙이다보니 무리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그러나 강압정책에 따른 부작용도 많았지만한 자릿수 물가는 달성되고 경제 체질은 강화되었다때마침 도래한 3()의 기회를 살려 한국경제는 살아나고 88올림픽을 전후(前後)해서 우리나라는 최대의 호경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88서울 올림픽을 향한 강력한 지도력이 발휘하고 있었다끊임없이 자행되는 북한의 도발은 강력한 반공통치로 막아내고전두환은 나라경제 회복과 도약에 집중하였다그렇게 대한민국은 전두환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인해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국민의식도 날로 개선되어갔다교육은 그 목표를 잃지 않았고시민들의 질서의식도 향상되어 갔다.

 

그러므로 경제의 번영은 실로 전두환 통치시대의 백미(白眉)로 보아야 한다물론 19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같은 세계사적인 업적도 있으나경제의 발전과 완성이야말로 민족사적인 업적이라 보아야 한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에 이바지 한 점이 크다오늘날 우리가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이루고 세계인의 존경을 받으며 G20에 가입하게 된 것은 전두환 전()대통령의 공이 가장 크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전두환 경제의 진행과정을 살펴보자.

 

(박정희 대통령 시대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이 3차에 걸쳐 성공리에 끝나고 있을 때우리는 10.26을 겪게 된다그 사건으로 우리는 박정희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고망망(茫茫)한 대해(大海)를 표류하고 있었으며대한민국 정치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였다물가는 치솟고 있었고어렵사리 구축해온 중화학공업마저 경제 위기를 촉발시키는 골치덩어리로 전락하고 있었다그러나 전두환 집권 3년 후 1983-1984년 GNP 성장률은 10.2%, 도매물가 상승률은 0.5%, 저축률 26.6%를 기록한다.

 

중화학공업은 성장주도 산업으로 부상했고반도체컴퓨터 등 신기술 제품이 양산체제로 돌입하며 국제경쟁력을 확보해 나가게 되었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우리나라가 자동차산업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현재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필자(筆者)가 교단에 발을 들여놓을 때가전두환 집권 2년째인 1982년의 일이었다경제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게 되자사회전반에 걸쳐 고급인력에 대한 수요가 늘게 되었다이에 각 기업들은 인력을 충원하고자 취업박람회를 여는 등 대학가는 말 그대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교단도 마찬가지였다수많은 학교가 세워지고 교사들이 부족하게 되자단기 양성 과정을 거친 비사범계 출신들도 교단에 서게 되었다먼 섬마을이나 벽촌으로 발령을 난 교사들은 아예 부임조차 하지 않고 기업으로 나갈 때였다한마디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흥이라는 말이 실감날 때였다.

 

그야말로 단군 이래 최대호황을 구가했던 전두환이 이끈 5공시대의 경제는 전두환 리더십의 결과였다고 본다이해를 돕기 위해전두환 시대 경제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자료를 요약해 본다.

 

*​ 소매물가상승율

1980년 29%, 1982년 7.1%, 1983년 3.4%, 1985년 2.5%

 

외채 및 외채잔액

1979~1981 3년 간 외채 2배 증가, GNP의 50% 넘음세계 4위 채무국이 됨.

1986년 24억불 감소되어 468억불이 되었고, 1987년 356억불로 외채가 줄어듦.

 

경제성장율

1980년 -5.6%, 1981년 6.6%, 1982년 5.4%, 1983년 11.9%, 1984년 8.4%, 1985년 12.3%, 1986년 12.92%, 1987년 12.97%, 1988년 12.42%

 

국민저축율

1980년 20.8%, 1985년 28.4%, 1986년 32.5%, 1987년 37%​​

 

*국민총생산

1980년 630억불, 1987년 1,360억불​ (오스트리아벨기에그리스노르웨이스웨덴의 국민총생산을 넘어섬)

1988년 1,800억불​​

 

*1인당 소득

1980년 1,600, 1987년 3,218, 1988년 4,300​​

 

*무역

1982년 국산승용차 pony 미국에 수출, 1984년 엑셀(프레스토미국 대량 수출​​, 1987년 세계 12대 무역대국으로 성장

 

경상수지

1980년 -53억불, 1981년 -45억불, 1982년 -26억불, 1983년 -16억불, 1984년 -14억불, 1985년 -9억불, 1986년 +46억불

이렇게 경제가 호조를 보임에 따라전두환 시대에 드디어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등 복지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그러므로 오늘날의 풍요로운 복지정책이 누구로 인해 시작되었는지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경제성과에 대해후일 전두환은 이렇게 담담하게 술회(述懷)한다.

 

"나는 내 일생을 통틀어 1986년이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된다취임 초에는 나라 형편이 어려워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는데 6년 만에 국제수지가 흑자라니 꿈만 같았다나는 당장 대통령을 그만둬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또 물가를 한 자릿수로 정착시킨 가운데 12.5% 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또 사상 처음으로 국민저축률이 투자율을 상회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동안 긴축정책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잘 협조해준 모든 국민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경제는 우연(偶然)이 있을 수 없다저축을 우연히 했다는 말이 있을 수 없듯이 경제는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다전두환의 노력과 투지불굴의 집념은 대한민국의 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켰다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엄청난 국방비를 부담하면서도 그와 같은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라고 해야 할 놀랍고도 위대한 성취라 할 것이다.

 

단임(單任실천

(단임 :원래 정해진 임기를 다 마친 뒤에 다시 그 직위에 임용하지 않음.)

 

전두환은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온대한민국 현대사에 기록된 최초의 대통령이다달라이 라마는 욕심의 반대는 무욕(無慾)이 아니라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이다고 하였다전두환은 달라이 라마가 말한잠시 머무름에 만족한 행복한 위인(偉人)이었다.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는 것이 올바른 인간이다탐욕이 지나치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우리는 삶의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보고 겪는다지나치게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게 넘치지 않게 산다는 것이것이 인간사 고통과 번민을 이겨내는 유일한 삶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재물욕색욕식욕수면욕명예욕(권력욕다섯 가지 욕망을 오욕(五慾)이라고 칭하며 차고 넘침을 경계한다이러한 비록 욕심은 생존 본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그러나 지나치게 탐하면 삼구(三垢)의 하나또는 삼독(三毒)의 하나로모두 몸을 망치는 독()이 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먹고 싶고 자고 싶고 누리고 싶고 번식하고픈 욕망을 견디고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드는 일이기에 우리는 탐하되 지나치지 않음을 수양의 첫째 덕목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옛 선인들이 말하기를 오욕(五慾중에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권력욕이라 하였다권력을 쥔 자가 그 권력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식욕(食慾), 수면욕을 참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뜻이다.

 

권력을 탐하다가 끝내 독재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면권력욕이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그리하여 세계의 독재자들이 그 교훈을 알면서도오래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권력을 내려놓기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권력만큼 달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천하가 내 손에 있고모두가 발밑에 있는데스스럼없이 내려놓기가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따라서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사람이 있다면그는 독재자일 수 없다전두환 전(대통령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혹 통치 과정에서 강압과 독선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적어도 전두환은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고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소인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전두환은 자신의 의지와 생각에 솔직한 사람이었고비록 직선적이며 행동적이며 단순해 보이되자기가 행한 행동에 구차한 변명이 없었던 사람이었다그는 언어 구사력도 단순명확하였다그는 긴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리고 한번 내린 결정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전두환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견해는 필자(筆者)뿐만이 아니다경제를 좀 안다는 사람들이나 지난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입을 모은다. ‘조금은 서툴게 보이지만 그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자였다.

  

그렇다면 이 견해를 밑받침하기 위해전두환 시대 이후(以後)를 통시적으로 살펴보자.

 

전두환은 헌법을 개정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선제 대통령으로서 제5공화국을 열었다소위 체육관 대통령이라고 비아냥거리던 그 간선제 대통령이었다. 1981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의 시기가 전두환 대통령이 이끌던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이었다당시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정하고 있었다.

  

다음 노태우의 제6공화국 1기는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의 시기이다. 1987년 6 · 29 민주화 선언으로 9차 개헌을 실시하여 직접 선거에 의해 노태우가 5년 단임제의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이후로는 헌법 개정을 통한 정치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각각 기수 내지는 별칭으로 구분을 한다.

  

노태우 정부를 6공 1기라 한다면김영삼 정부는 6공 2기 또는 문민의 정부라 하였고김대중 정부는 6공 3기 또는 국민의 정부라 불렀다.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공식 출범한 정부 역시 법적으로는 제6공화국 4기 정부이다이명박 정부는 제6공화국 5기 정부로서 실용정부라고도 하나정확한 별칭은 없다박근혜 정부는 제6공화국 6기 정부였고문재인 정부 제6공화국 7기 정부가 진행되었으며지금 윤석열 정부는 6공 8기인 것이다.

  

이것이 전두환 이후 진행되어온 대한민국 정부의 통시적 과정이다따라서 중요한 것은전두환은 제9차 헌법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 제6공화국 1기부터 8기까지를 열어준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단임 실천은 전두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필자(筆者)는 확신한다그가 만약 일반의 독재자라면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반드시 정권 연장을 꾀했을 것이고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에를 들면 군을 동원해서라도 정권을 존속시켰을 것이다.

  

국가의 마지막 보루는 국군이다그러나 대한민국 당시 60만 국군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지배구조가 확실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전두환의 명령 하나에 60만 국군이 계엄령을 통해 등장했다면그깟 한 줌도 안 되는 민주화 세력쯤은 간단히 처리했을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 정도는 간단히 없앨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그러나 전두환은 가택연금이나 정치적 봉금(封禁)은 시켰을지언정 생명을 노리지는 않았다그리고 군을 동원하지 않았다후일 김대중은 그의 재임기간 가끔씩 전두환을 청와대로 불러 환담을 나누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김영삼은 사형명령을 내렸으나김대중은 그러지 아니하였다어쩌면 김대중은 전두환의 인품과 공적을 믿어준 유일한 대통령이었을지 모른다.

  

에피쿠르스는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고 하였다.

 

전두환은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위인(偉人)이었고 행복한 사람이었다과감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 7년 단임을 분명하게 실천한 사람으로서 그는 군부통치의 탈을 과감하게 벗은 우리의 대통령이었다그러므로 그가 단순솔직한 무인(武人)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정말 대단한 결단이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개헌

  

미국 유학 중이던 장남 전재국은 부친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을 진언한다내각제와 직선제 사이에서 고민하던 전두환은 결국 직선제로의 결심을 굳힌다그리고 6.29 선언이 있었다전재국 또한 대한민국을 위한 결정에 합류한 셈이었다.-

 

 

1. 의원내각제

 

 

전두환은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를 선호한 사람이었다대통령제의 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는 내각제를 선호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오늘 여러분에게 처음 말하지만나는 솔직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두려운 때가 많았다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내기 위해 다들 서류를 잔뜩 챙겨오는데결심을 해야 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중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미국에서 무기를 사들이겠다는 재가서류가 올라왔는데도대체 제시된 그 가격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또 비싸면 비싼 만큼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인지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대통령 중심제는 아주 작은 일에서 국가의 생존과 관련되는 큰일까지 모든 것이 대통령 하나에 달렸다는 것이다따라서 수많은 문제들을 대통령 한 사람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두환은 1986년 4월 5일 유럽순방길에 오른다영국서독프랑스를 방문하면서 그는 의원내각제에 확신을 갖게 된다영국의 대처총리는 전두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건네준다.

 

 

영국은 지역감정의 골이 아주 깊은 나라입니다얼마나 심하든지 축구대표팀조차도 단일국가대표팀을 구성할 수가 없습니다언제나 각 지역의 대표팀이 따로따로 출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따라서 이런 판국에 영국이 대통령중심제를 선택했다면 국론 분열과 국력낭비가 극심했을 것입니다.”

 

 

서독도 의원내각제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대한민국 역시 영국처럼 지역감정의 골이 깊은 나라이며국론 분열이 극심한 나라이다비록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였지만그 개발과정에서 일어난 지역감정은 망국(亡國)적인 현상이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 후전두환은 진정한 정치발전을 위해 의원내각제를 결심하게 된다또한 개헌의 방향도 의원내각제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였다그리고 모든 시위와 집회의 주제를 대통령 직선제로 몰아갔다국민들도 우리 손으로 뽑는 대통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시위에 동참하였고결국 전두환은 의원내각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잘못된 선택이었고, 6.29 선언을 마치 위대한 승리로 포장한 민주화세력들의 오판이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전두환의 뜻대로 의원내각제를 하고 있다면어느 한 정당의 전횡은 사라졌을 것이며권력을 잡기 위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식의 심각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지금 대한민국은 좌우세력들이 권력을 잡은 다음 보복과 복수로 일관하고 있다마치 조선시대 당파싸움을 연상케 하고 있지 않은가.

 

 

후일 이 의원내각제는 자민련을 이끌던 운정 김종필을 통해서 다시 부활한다김대중의 대선승리를 위해김종필은 김대중과의 합당 조건으로 대선 승리 후 의원내각제를 하기로 철통같은 약속을 한다그러나 김대중은 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다그리하여 대한민국 역사에서 의원내각제 논의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2. 대통령 직선제 개헌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모두 9차례 개헌을 했다이해를 돕기 위해그 9차례 개헌의 과정과 내용을 간추려 정리해 본다.

 

 

<1공화국>

제헌헌법-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구성된 국회(제헌국회)가 헌법기초에 착수하여 동년 7월 17일 공포대통령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함.

이승만 정부

 

 

1차 개헌(1952년 발췌개헌)-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승만이 국회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장기 집권을 위해 강제력을 동원하여 헌법을 개정함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의원내각제를 주내용으로 하는 의외 발의안이 충돌하자정부와 의회가 협장으로 양 개정안에서 발췌한 발췌개헌안을 만들어 공고절차도 없이 기립표결로 통과이렇게 야당의 개헌안과 정부의 안을 절충한데서 '발췌개헌'이라고 함.

 

 

2차 개헌(1954년 사사오입)- 이승만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

대통령의 중임을 1차로 제한한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철폐하는 것이 골자.

당시 국회에서 재적 203명 중 135표를 얻어서 개헌선(재적 2/3인 135.333)에 0.333인이 미달되어 부결되었다의장은 부결을 선포했으나 2일후 '45이론을 내세워 개헌선을 135표로 수정하여 개헌을 선포하였다.

 

 

<2공화국>

3차 개헌(1960년 6)- 4.19 혁명 후 내각책임제로 전환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 선거는 대대적인 국민의 저항을 받아 4.19로 이어지게 되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이승만은 하야하였고그 후 의원 내각제 정부 형태로 3차 개헌을 하게 되었다개헌에 따라 의원내각제가 도입 되었고장기집권에 따른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보장하고 공무원의 신분 및 정치적 중립성 보장하는 내용이다.

 

 

4차 개헌(1960년 11)- 허정 과도내각반민주행위자처벌에 관한 부칙조항 삽입

3.15부정선거 관련 반민주 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적용을 허용하는 헌법부칙만 개정.

 

 

<3공화국>

5차 개헌(1962년 12)- 장면 내각. 5.16 발생 후 대통령제로 전환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하는 5.16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이후 민정 이양을 위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대통령제로 복귀하고 대통령의 재임을 2기로 국한하는 5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 투표로 확정되어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5차 개헌은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거친 헌법 개정이었다.

 

 

6차 개헌(1969년 3선개헌)- 박정희 대통령 3선을 위한 목적으로 단행

5차 개헌때 3선을 금지한 조항을 철폐대통령의 재임을 3기까지 가능하게 함.

 

 

<4공화국>

7차 개헌(1972년 유신헌법)- 유신체제 전환을 위한 개헌

1972년 1017일 비상초치로 헌정이 중단되었고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만들어진 개정안이 11월 국민투표를 통과하였다유신헌법의 특징은 기본권의 약화와 대통령의 1인 장기집권체제의 제도적 확립이다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되며임기는 6년으로 중임이나 연임제한에 관한 조항을 두지 않아 1인 장기집권이 가능하였다.

 

 

<5공화국>

8차 개헌(1980)- 신군부 집권에 따른 전두환 정권으로의 전환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고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하자 12.12사태로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가 정권 장악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자의로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헌법을 만들고 국민투표로 확정하였다이 헌법은 전면 개헌으로서 대통령을 간선으로 뽑고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였다.

 

 

<6공화국>

9차 개헌(1987년 현행헌법)- 대통령 직선제

1987년 범국민적 저항운동 6월 항쟁이 일어나자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이른바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그 결과 최초로 여야 합의를 통해 개헌을 하게 되었다.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하고 5년 단임으로 하였다.

 

(전두환 정부에서 개헌 함현재 윤석열 정부 또한 6공화국 연장선상임)

 
 

. 9차 개헌의 증언과 기억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 선언은 전두환의 구상과 결단에 따른 소산(所産)이었다노태우는 자신이 한 일이라고 주장하나당시 통치구조상 전두환 재가없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유명무실한 헌법위원회를 없애고 헌법재판소를 만든 것도 전두환 작품이었다. 6월 항쟁은 오직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을 뿐이고이는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다. -

 

 

전두환은 1986년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하자그때에야 비로소 얼어붙은 정치를 해금시킨다경제에 자신이 생기자드디어 정치선진국으로의 길을 향해 물길을 튼 것이다.

 

 

1987년 6·29선언으로 여야 합의하에 개헌안이 의결되고, 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찬성률 93.1%)로 확정, 29일 공포, 88년 2월 25일부터 시행된 제9차 개헌6공화국의 헌법이 된 이 개헌안의 개헌 과정을 간추려 본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1985년 2·12총선거를 통해 제도권 정당의 지형도가 새롭게 재편되고 야당과 재야운동단체들의 연합으로 반정부 세력의 규모와 내실이 강화되는데 있어 중요한 핵심 의제로 작동했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법적으로 보장가능하게 했던 제5공화국 헌법 개정의 문제는 2·12총선거 직후부터 야당과 민주화운동 내부에서 꾸준히 제기되었다.

 

 

2·12 총선거를 통해 창당한 지 채 1개월도 안 되는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고지도부는 1985년 8월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식당론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를 12대 국회의 일차적 의제로 설정했다.

 

 

1985년 9월 신민당은 정기국회에서 개헌을 위한 특별위원회(개헌특위)’ 설치를 공식적으로 제안했다신민당의 이러한 정치적 전략은 국회 내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을 둘러싸고 민정당과의 갈등 형성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세력 내부에서의 찬반 논의를 촉발했다.

 

 

민주화운동단체들은 전두환 정권의 퇴진을 전제로 완전한 민주정부 수립나아가 민중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삼은 개헌론을 제기했다직선제 개헌을 중시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개헌론 및 노동운동세력의 일부가 제시한 삼민헌법쟁취투쟁론까지 민주화운동세력 내부에서도 개헌에 대한 입장들의 스펙트럼과 정치적 차이는 컸다.

 

 

신민당이 제기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에 대해 민추협’, ‘민주헌정연구회’, ‘민주산악회’, ‘민주대학’ 등 신민당의 외곽 정치조직들은 찬성했으나, ‘민통련을 비롯한 급진적 노동운동세력의 일부는 이를 거부했다특히 야당 정치세력과 민중운동 간의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은 1985년 10월 5일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안양지역 노동 3권 쟁취위원회’ 등과 연합해 전국노동자 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 쟁취위원회를 결성하고 결성선언문에서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이 목표가 아니며, “민중이 주인되는 새로운 사회를 핵심 목표로 천명했다.

 

 

여기서 민중이란 근로인민대중의 준말이다프롤레타리아라는 뜻이다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민중의 정부를 주창하면서북을 옹호하고 반미(反美)를 부르짖는 문재인 정부를 본 적이 있다우리 대한민국의 비극은 그때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운동계에서도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이 10월 26일 전국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서명운동을 결의했으며, 10월 29일 서울지역 6개 대학에서 삼민헌법쟁취투쟁위원회가 삼민헌법쟁취실천대회를 개최했다. 11월 28일에는 전학련 산하 군부독재타도 및 파쇼헌법철폐 투쟁위원회’ 소속 서울시내 14개 대학이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기습 점거하기도 했다.

 

 

1987년 6월은 한국 민주화의 원년으로 기록된다그러나 그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독재자라는 전제 하()에 기록된 역사다전두환 대통령이 민주주의자가 분명하다면이는 오류의 기록이라 할 수밖에 없다필자(筆者)가 쓰는 이 글의 주제 역시 6월항쟁에 대한 일반의 견해와 기록을 부인한다대한민국 민주화는 전두환의 경제가 성공할 때부터라고 해야 한다전두환은 1986년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하자그때에야 비로소 얼어붙은 정치를 해금시킨다경제에 자신이 생기자드디어 정치선진국으로의 길을 향해 물길을 튼 것이다.

 

 

1987년 5월 27일 결성된 국본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선언문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단순히 헌법상의 조문개정을 뛰어넘어 유신 이래 빼앗겨온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기본 권리를 확보하기 위함이며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정부선택권을 되찾음으로써 실로 안으로 국민다수의 의사를 실행하고 밖으로 민족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는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가능케 함이라고 규정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은 1987년 한국 민주화를 위한 반정부운동의 상징적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등장과 소멸협상과 합의의 복합적 구성 과정이었다. 10·26사태 이후부터 2·12총선거시기를 거쳐 1987년 6월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론을 정부의 공식의제로 받아들일 때까지그리고 7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당대표의 선언을 공식적으로 승인할 때까지그리고 9차 헌법 개정 과정이 완료될 때까지 직선제 개헌론은 상이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는 저항세력과 집권세력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협상의 핵심 축으로 작동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6·29선언 이후 국본은 7월 13일 산하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설치했으며 8월 4일에는 헌법개정요강이라는 자료를 발간했으나 실질적으로 개헌협상은 제도권의 민정당과 민주당에 의해 주도되었다그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수렴은 전혀 없었다.

 

 

6·29선언 이후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제도정치권의 개헌협상 과정에서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은 각각 개헌안 시안을 마련했으나 여러 측면에서 이견이 있었으며특히 대통령 임기와 부통령제 신설에서 큰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1987년 8월 3일부터 시작된 집권여당과 야당의 8인 정치회담은 8월 31일 전문과 130개 조항의 본문에 합의를 이끌어냈으며, 9월 16일 부칙까지 합의했다. 19차에 걸친 회담 끝에 8인 정치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넘겨받은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는 9월 17일 전문과 본문 10장 130조와 부칙 6조로 구성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10월 12일 대한민국 국회는 제헌국회 이후 최초로 여야 합의에 의한 헌법개정안을 가결했다.

 

 

당시 개헌에 참여했던12대 국회 헌법개정안 기초소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현경대 전(의원은 이렇게 증언한다.

 

 

대통령직선제로 합의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은 중임이냐아니면 단임이냐는 문제였다. 4년 중임안은 너무 위험했다대통령과 정부가 연임을 위해집권 기간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인기영합에 집중할 위험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그렇다고 7년 단임은 너무 길어서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결국 5년 단임으로 결정을 내렸다정말 심사숙고라는 말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93.1%의 찬성을 얻어 29일 최종적으로 공포되었으며, 1988년 2월 25일부터 시행되었다6공화국의 헌법이 된 이 개헌안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전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의 계승 및 조국의 민주개혁의 사명 명시,

② 총강에서 국군의 정치적 중립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정책 수립 추진규정 신설,

③ 기본권에서 구속적부심청구권 전면보장범죄피해자에 대한 국가구조제 신설형사피의자의 권리 확대허가·검열의 금지에 의한 표현의 자유 확대,

④ 국정감사권 부활국회 회기제한규정 삭제,

⑤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단임제대통령의 비상조치권·국회해산권 폐지,

⑥ 대법관을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

⑦ 헌법재판소를 신설위헌법률 심판·탄핵심판·국가기관 간 권한쟁의 심판·헌법소원을 관장하게 한 것 등이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가 생긴 것도 모두 전두환이 꿈꾸던 일이었다전두환은 유명무실한 헌법위원회를 폐지하고헌법 수호에 대한 실질적 권한을 갖는 헌법재판소를 설립하였다이 헌법재판소가 후일 박근혜 탄핵을 결정한다.

 

평화로운 정권 교체

 

 

과거 문재인 정부와 정치세력들은 개헌을 말하고 있었다그러나 말만 있을 뿐이지개헌의 목표와 의도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있었다따라서 찬반의 공방도 없고민의(民意)를 추출할 토론의 광장도 열리지 않았다그러므로 그 개헌이 대한민국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인지아니면 좌파정권의 연장을 노림인지에 대한 국민적 판단도 없게 되었다한마디로 과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비록 내각제에 대한 꿈을 접었지만 최선을 다해 9차 개헌을 했고그 헌법으로 윤석열까지 무려 8기에 이르는 6공화국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앞으로 있을 개헌이 전두환 대통령이 그토록 근심했던 4년 대통령 중임제로의 개헌이라면문제가 있었다. 1000조 빚더미에 앉아 있는 우리나라가 연임(連任)을 위한 퍼주기식 포퓰리즘 정책으로 나라가 거덜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과거 문재인 좌파정부가 시도하는 정책 대부분이무상급식부터 무상교복까지 대중을 향한 인기영합주의로 일관하고 있었지 아니한가.

 

 

우리 대한민국은정치다운 정치가 필요할 때이다비록 정권을 놓는 한이 있더라도차기 집권에 실패하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올바른 정책을 펼칠 위대한 정치가 절실하다그러나 과연 보수와 진보좌우를 막론하고 전두환 대통령만큼 고민하였던 정치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드디어 9차 개헌에 의해 탄생된 헌법에 의하여,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1971년 4,27 대통령 선거 이후 무려 16년 7개월만에 이루어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다민정당 노태우민주당 김영삼평민당 김대중()공화당 김종필 후보가 맞붙은 선거였다이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828만 2738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우려한 대로 지역주의 투표성향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김영삼의 부산 경남김대중의 호남김종필의 충청도로 나뉘어진 투표였고이 지역감정이 내재된 투표성향은 지역감정의 골을 깊이 파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마침내 민정당은 정권재창출에 성공하였고전두환은 소망하는 단임 실천과 평화적 정부 이양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게 되었다.

 

민주정치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조차도 최초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것은 대헌장(Magna Carta) 이후 413년이 지난 후였다따라서 전두환의 단임 실천과 평화적 정권 교체는 전두환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그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킨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전두환은 1988년 1월 7일 송별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즘 졸업을 앞두고 있는 학생과 같은 심정이다우선은 쉬고 싶다대통령은 국민 중에 가장 자유가 박탈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2월 24일 환송만찬연에서

 

 

이제 역사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이제 그 무거웠던 책임자의 고독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전두환은 그렇게 물러났다그러나 그는 쉴 수 없었다. 1988년 3월 4일에는 그 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천거되었다이는 그해 1월 29일에 이미 추천 수속이 끝난 것이었다.

 

 

전두환을 추천한 유럽의회 관계자들이 12.12 사태를 통한 전두환의 등장과 5.18의 비극을 모를 까닭이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자발적으로 노벨평화상 추천에 나섰다바로 이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우리는 왜 좌익들이 5.18을 끝까지 이용하고 있는자그러나 세계는 노벨평화상에 왜 5.18 문제를 개입시키지 않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그리고 전두환 노벨상 추천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어두운 그림자도 잊어서는 안 된다.

 

 

5.18이 민주화투쟁이냐 폭동이냐는 문제를 떠나 유럽의회 관계자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재임 중 발생한 안전보장상의 중대한 위기, 83년의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미수 사건, 87년의 KAL기 폭파추락사건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한반도의 평화유지에 공헌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그리고 이에 더하여 평화적 정권 교체그들은 이 두 가지를 이유로 들어 전두환을 노벨 평화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추천했다는 점을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전두환 대통령에 의하여 우리나라 경제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비록 김영삼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지만오늘의 풍요를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이 이루어 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백담사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호()는 일해(日海)이다. ‘해 뜨는 바다라는 뜻이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호를 알고는 있으나설마 이 호를 탄허스님이 지어준지는 모른다잘 알려진 바대로 탄허스님은 민족의 영광을 예언한 우리 시대의 큰스님이셨다아마 불자(佛者)치고 탄허스님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법정스님도 백담사에 있는 전두환 대통령을 자주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만큼 많은 스님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백담사행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당시 큰스님들치고 전두환을 찾지 않은 스님은 드물었다고 본다. -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그리하여 군에 남아 있고자 하였던 노태우를 예편시켜 정무장관을 시킨 것부터 88서울올림픽, 86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민정당 총재까지 후계자로서의 모든 수업을 마치게 하였다그리고 대통령 당선 후에는 통치자금까지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는 세간에 알려진 전두환 비자금의 실체인지 모른다전두환 비자금 대부분이 노태우의 통치자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닌가 싶다평소 돈이라고는 봉급 봉투 한번 만져보지 않은 전두환의 인품으로 봐서 숨기고 감출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태우는 전두환을 배신한다당시 전두환을 제외한 많은 언론인들과 측근들은 노태우를 신뢰하지 않았다그 중에서도 김정렬은 전두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노태우를 잘 아십니까?”

전두환은 그렇다고 하였다.

1년 후 88년 봄김정렬은 다시 묻는다.

지금도 노태우를 믿습니까?”

전두환은 같은 답변을 한다.

잘 안다지금도 믿는다.”

 

 

전두환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이다전두환은 이 답변이 있은 후 약 6개월 후에 백담사로 유배를 떠난다. 1988년 3월 31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비리와 관련하여 친동생 전경환이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5공 비리가 터져 나오자노태우는 정국 안정을 위해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낸 것이다. 1988년 11월 23일의 일이었다.

 

 

전두환은 의리를 중시한 사람이었다그리고 한번 믿은 사람을 두 번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전두환은 노태우를 향해 "나를 밟고 올라가라"는 발언으로 노태우를 적극 지지하고 후원한진정한 의미의 친구였다그러나 노태우는 짓밟는 정도를 넘어서서 전두환을 백담사로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일종의 유배형전두환은 몇 개월만 지내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1989년 12월 31일 국회에 출석해서 5.18 민주화운동 증언을 할 때까지전두환이 집으로 가기에는 2년 이상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당시 백담사로 떠나기 전전두환은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남긴다.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 “본인이 재임했던 기간에 있었던 모든 국정의 과오는 그것이 누구에 의해 착안되었고 또 어느 기관의 실무자가 시행한 것이건 간에 모두가 최종 결정권자이며 감독권자인 바로 이 사람에게 그 책임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저로 인해서 온 사회가 들끓고 있는 큰 물의가 빚어지고 있는데 대해 한량없이 죄송스럽다

.

 

(광주문제에 대해그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대통령이 된 뒤에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는 점을 깊이 후회하면서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지 않겠다당시의 국가적 비상시국하에서 아무런 준비와 경험도 없이 국정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또한 오랜 병폐를 하루 빨리 뿌리뽑고 기강을 바로잡아 사회의 안정과 국가발전을 도모해야한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시행착오를 가져오게 된 것이라고 솔직히 인정한다.

 

 

국민의 기본적인 권익을 침해한 이러한 사례들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이 기회를 빌어 피해당사자 한분 한분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친인척비리와 관련재임중 처리하지 못한 채 대통령직을 물러난 지금 많은 집안사람들이 형사소추를 받을 정도로 비리를 저질러서 국민 여러분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은 참으로 면목이 없다진심으로 사죄하며 머리 숙여 용서를 빈다.

 

 

연희동집 안채 (대지 385평 건평 116.9와 두 아들이 결혼해서 살고있는 바깥채 (대지 94평 건평 78서초동 땅 2백평 용평의 콘도(34하나와 골프회원권 2건등 부동산과 83년 총무처에 등록한 19억여원과 그 증식이자를 포함한 23억여원의 금융자산을 갖고 있으니 이 재산은 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처리해주기 바란다.

 

 

퇴임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됨에 따라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나름대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사용할 요량으로 여당총재로서 사용하다가 남은 139억원을 관리해왔으나지난 4월 자문회의 의장직을 사임한 만큼 이제 이 돈은 우리나라 정치발전을 위해 국가가 관리해 주기 바란다.

 

 

여러분의 마음을 후련하게 풀어드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모처럼 시작된 민주화를 통해 국민의 화합을 이룩할 수 있다면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치면서 국민 여러분의 심판을 기다리겠다.

 

 

국민 여러분이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 여러분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조국을 떠나는 것이 아닌 한 속죄하는 마음으로 어느 곳이라도 가겠다.” -

 

 

 

전두환은 외국으로의 망명과 고향으로의 낙향 대신추운 절을 유폐장소로 택했다백담사는 손삼수 비서관이 조계종 당시 서의현 총무원장에게 추천 받은 곳이었다전두환은 그 때까지 백담사라는 절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었다그러나 불자(佛者)였던 형수를 통해 백담사 대웅전 불사 때 보시를 했던 적이 있었다대웅전 어느 기둥 주춧돌 밑에는 전두환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고 한다.

 

전두환은 백담사에서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묵었다이 방은 두 사람이 눕고 나면 윗목에 책상 하나를 겨우 놓을 수 있었다방을 덥히려 아궁이에 군불을 때면 매운 연기가 방을 채웠다수도도 전기도 없었다백담사에서 전두환은 노태우의 배신에 대한 분노로 밤을 새운다의리를 중시하고사내다움을 철칙으로 여겼던 전두환이었기에 분노는 그만큼 컸다.

 

 

그 무렵 법정 스님지학순 주교김장환 목사 등이 다녀갔다전두환은 예불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다전두환은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일해'라는 아호를 준 탄허 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국태민안과 영가천도'를 위한 기도를 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 영령들과 일본에 의해 희생된 한민족 영령, 6.25전쟁 희생 영령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 영령삼청 교육 희생 영령 등의 천도를 빌었다기도는 매일 새벽 4오전 10오후 2오후 6시 네 차례씩 했다이 가운데 오후 2시 기도는 불교 교리 공부나 경전을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전두환은 경전 공부를 한 오후 2시 기도 외에 하루 세 번 기도 때마다 108배를 했다기도를 시작한 지 20일째 첫 번째 장애가 왔다지독한 몸살이었다. 50일이 지나자 육식을 금해서 생긴 메스꺼움과 구토 빈혈을 동반한 입덧 증세가 나타났다전두환은 죽을 각오로 버텼다그리고 가피(加被)를 얻은 것이다.

 

 

가피(加被)일체중생이 부처의 은혜 속에서 생명을 유지 보존하게 하는 일이다그리하여 모든 중생은 사은의 가호하심과 가피를 입고 살아가며중생은 그 은혜를 알고 보은행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전두환의 가피(加被), 그것은 부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에 열중한 결과였다.

 

 

당시를 전두환은 이렇게 기억한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기도 70일 가량 지나자 우리 내외를 괴롭히던 증세가 말끔히 사라졌다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오랜만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 얼굴이 맑아지고 빛이 난다고 했다."

 

 

이때 비로소 전두환은 분노와 번민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과연 우리 같은 범인(凡人)의 그릇은 아니었다우리 같으면 평생 기도를 해도 얻기 힘든 가피를기도 70일 끝에 얻는다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불법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태우에게 업보(業報)가 찾아든다. 5년 후노태우는 차기 대통령감으로 김영삼을 후계자로 낙점한다. 5공청산을 부르짖는 민주화세력들로부터 김영삼의 보호를 받으려 했을 것이다그러나 김영삼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군사정권으로 매도하며, 5.18특별법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학살자로 만들어 법정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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