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니족의 4박 5일--중국 소수민족의 애환과 미래 희망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1편
2006년 졸업 후 박사학위 논문('동북아 조선족 사회의 성립과 미래 전망')을 주제로 국내 '박영사'에서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는데, 그 책이 2008년도 대한민국학술원 기초학문육성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그후 그 책을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감수하고 중국외교부 소속 '세계지식출판사'에서 <동북아시대의 조선족 사회>란 제목으로 중문판을 발행해 주었다. 연변대학을 중심으로 그 지역에 있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의)조선족 사회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발간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의 얘기다.
그런데 그 책이 한국에서 학술원 상을 타게 되었고, 또 중국 외교부 소속 출판사에서 중문판으로 발간해주는 바람에 중국 소수민족학계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어 버렸다. 기업인 신분으로, 그것도 아주 늦은 나이의 만학을 했지만 결과치가 좋게 평가되어 북경대학 동북아연구소(송성유 소장 : 한중 간에 '동북공정'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을 때 한국 학계의 주장을 지지하셨던 분)에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었을 뿐 아니라 관련 분야 학술컨퍼런스를 할 때면 으례히 주제발표 또는 패널로 초청해주곤 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몇 년 후에도 <누가 이 시대를 이끌것인가>를 출간했을 때 마찬가지 경로로 중국 외교부 소속 출판사에서 중문판으로 발간해 준 책이<走向大同>이었으며, 이를 일본 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호사까 유지 교수가 동경 후류샤(芙蓉書房出版)에 의뢰하여 출간한 책이 <한국인이 본 동아시아공동체>다.)
이러한 노력의 여파로 국내에서 '동북아공동체연구회'(1997년, 통일부 등록)를 창설하게 되었고, 그 이후 끊임없이 남북한 문제와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제정세 파악에 천착하며 중국내 조선족 사회와 동북아 주변국가들이 한반도 역사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꾸준히 토론하고 협의해온 세월이 무려 20년에 가깝다.
이런 가운데 연변과기대(YUST)와 평양과기대(PUST)라는 두개의 기둥이 이 모든 학구적 노력을 뒷받침하고 견고히 지키는 보루가 되어 주었으니, 1990년 중국 칭다오에 골프장 건설사업을 하겠다고 갔다가 북경에서 우연히 연변과기대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김진경 총장을 만나 교육사역에 투신한 이후 지금까지 지내온 나의 인생 후반전의 흐름을 되돌아 보면, 참으로 기이하고 예기치 못한 우연의 연속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006년도 졸업한 중앙민족대학 박사학위자(이전에는 석사 이상이면 교수직을 수행했는데 중국 교육법이 강화되어 박사급 이상이라야 교수직을 연장 할 수 있게되어 지방대학 30-50대 교수들이 박사생으로 많이 진학했다)가운데 중국 소수민족 언어학, 사회학, 인류문화학, 민족경제학 등을 전공한 12명의 교수들이 졸업 이후에도 계속 우의와 지적 교류를 나누자는 뜻으로 만든 친목회가 '민박회'다. 매년 1회씩 여름방학 시즌에 만나 소수민족 교수들의 출신지역을 탐방(5일 -6일 정도)하면서 그동안 연구해온 논문 또는 저서를 교환하고 주제 발표를 하는 등 학술활동을 겸하는 투어형 동창 모임이다.
그새 돌아다닌 곳만 해도 내몽고자치구 허후타와 적봉, 신강지구 우루무치, 조선족자치주 연길(2회), 해남도, 북경(3회), 토족과 장족들이 사는 곳, 한국(제주도) 등이다. 필자가 연장자로서 민박회 회장을 맡게 되었고 연변대학교 전신자 교수가 비서장(사무총장 격)을 맡기로 하여 2007년 부터 시작한 동행이 지금까지 12회 모임을 가졌다. 2020년부터 4년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만나지 못했다가 올해 5년만에 연변자치주 연길에서 눈물젖은(?) 해후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민박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8월23일 부터 27일 까지 연길을 다녀왔다.
4박5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재밌고 유익한, 그리고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는 참으로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격적 관계로 점철된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전신자 교수 내외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목욕탕 설비가 잘 되어있는 대양사우나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오늘 중으로 도착하겠다고 예약한 11명(중앙민족대 박사생 정회원 9명, 박사급 배우자 명예회원 2명)의 회원들 가운데 7명이 띄엄띄엄 도착했고 나머지 네 사람은 저녁 늦게 도착한다고 했다. 오후 내내 우리들은 회원들이 도착하는 대로 몇번이나 호텔 로비에서 반갑게 만나 서로 부둥켜 안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가 5년만에 만나는 셈이니 얼마나 반갑고 기쁘겠는가! 거기에다 한국에서 온 회장 부부를 만났으니 그 기쁨 또한 얼마나 컷겠는가! 이번 연길 행사에 참여한 전체 인원의 성별은 남자 넷, 여자 일곱 명이었다.
더구나 연길시가 최근에 중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로 정평이 났고 이에 편승하여 연길시 정부가 야간 관광 투어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강변 산책로를 걷다가 호텔 쪽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연변대학 앞 거리에 들어서자 그곳은 문자 그대로 불야성을 이루며 연변 관광문화의 새로운 추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중국과 한국의 문화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변경문화도시인데다, 연길시가 의도적으로 연변대학을 중심으로 디지털 문화와 MZ세대의 취향을 배합하여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줌으로써 중국 내지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문화적 해방구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평판이다.
2021년말에 개통한 심양- 장춘 – 연길 - 훈춘간 고속철도가 백두산(중국명 장백산) 관광구역 확장과 함께 연변조선족자치주 관광사업을 대폭 발전시킨 요인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조선족들의 한국 취업으로 재정능력이 고소득군에 속하게 되면서 소비생활 수준이 중국 선진도시 못지 않게 활성화되었으며, 거기에다 코로나 기간중에 한국에 관광가고 싶어도 못가는 아쉬움을 연길에 와서 한국식 음식과 문화를 접하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내지 관광객들(특히 남방지역 관광객들)이 대폭 늘어나면서 연길시 관광사업은 그야말로 대박을 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에 따른 도시 미관작업으로 야경을 오색 네온사인으로 치장했으니, 우리가 보기엔 좀 어색했으나 잘하고 있다고 박수를 쳐 주는게 도리일것 같았다. 호텔에 돌아와 사우나 목욕을 하고나니 피곤이 씻어지고 기분이 무척 상쾌해졌다. 도시 야경이 주는 이색적인 감흥과 함께 나른하면서도 평안한 '민박회'의 첫날밤을 맞았다.
2편
#1. 둘째 날(8월 24일) 두만강 하구 '방천풍경구', 삼꽃랭면
늦게 온 세 사람이 우리 내외를 보자 달려들듯이 다가왔다. 참으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로서 참석 예정자들이 모두 모인 셈이다. 우리들은 2층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원탁에서 조찬을 들며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 꽃을 피웠다. 어제밤 집에 갔다가 새벽같이 온 전신자 교수 내외가 연길에 상주하면서 변방도시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한국인 노귀남 박사(여)를 모시고 와서 우리 일행과 함께 동행하도록 소개했고, 독감에 걸려 혼자 방을 사용했던 우르 교수(남, 내몽고 퉁흐대학)도 늦지 않게 식당으로 내려와서 다같이 식사를 했다.
손춘일 교수와 기진옥 교수는 연변대학에서 개최중인 문화정책세미나에 발표자로 참석해야 하기때문에 방천 투어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머지 일행은 '중국의 땅끝'이라 불리는 방천으로 가기 위해 조식을 마치는 대로 곧 길을 떠났다.
두만강 일대에서 유일하게 육로로 연결되는 통행로다. 그런데 권하 세관 입구 광장에서 큰 수모(?)를 겪었다. 사복 차림의 젊은 공안 요원이 우리 내외를 보자마자 여권을 보자고 했으며, 비자 유무를 확인한 후 스마트폰으로 여권 기재 사항을 찍기도 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권을 가져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닌가. 직감적으로 여권을 줬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여자 교수들이 공안 요원에게 큰소리로 따지며 '당신이 뭔데 외국에서 온 관광객을 조사하느냐. 어디 상부에서 이렇게 하라고 지시한 문건이 있느냐. 있으면 내 놔라"라고 하면서 거세게 대들었다. 그제서야 공안 요원이 뒷걸음치며 돌아섰다. 우리들은 세관 앞 광장에서 단체 사진이라도 한장 찍으려고 했으나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중국 공안정치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마음이 극히 우울해졌다.
코로나 이전까지 필자는 이곳을 스무 번도 더 다녀갔다. 1991년 봄부터 연변과기대 건설 현장을 관리하기 위해 일년에 두 세 번 씩 연길을 다녀갈 때 틈만 나면 찾아온 곳이다. 그때마다 중국, 러시아, 북한 3국 경계가 합쳐져 있는 두만강 하구 유역을 바라보며 한반도와 동북아 역사의 새길을 여는 출구가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17년 이후 연변과기대가 폐교 절차를 거치며 신입생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자 나는 학교에 오기 싫어졌고, 거기에다 코로나까지 겹친 바람에 무려 7년 만에 '민박회'와 함께 방천 투어를 온 것이다.
그 사이에 방천풍경구 일대가 국립관광지 형태로 대대적인 개발을 꾀하여 위락시설 및 민속박물관, 숙박시설 뿐만 아니라 두만강 유람선(경신진에서 방천을 거쳐 두만강 철교까지 운행)을 다니게 했고, 또 지난해 용호각 서쪽에서 시작해 두만강 좌측 연강지대, 중러경계비, 토자비 등을 거쳐 용호광장에 이르는 총길이 2200m가 넘는 나무잔도(보행로 데크)를 설치하여 중국 내지에서온 관광객들에게 '중국의 땅끝'을 실감나게 관광하도록 조성해 놓은 게 눈에 띄었다.
또한 소련도 두만강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로 인해 중국은 두만강을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하고 말았다. 신중국이 건국된 이후 중국에서는 이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여전히 출해 통로가 막혀있는 실정이다.
그 소통로를 넓혀 두만강 유역을 국제적인 경제자유무역지대로 만들자는 것이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이승율 이사장)'의 구상이고, 이 플랜은 UNDP 및 GTI 프로젝트와 연관하여 언젠가 때가 되면 실현 가능한 일이 되리라 믿고 있다. 그렇다. 왠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궁지에 몰린 푸틴이 극동지역개발을 통해 새로운 국가경제발전정책을 펼치고자 할 때 한국을 연해주개발의 주도적 당사자로 채택할 공산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중,러,북 3국이 접하는 두만강 유역 일대를 한국이 참여하는 초국경국제협력지대로 변환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될 것이며, 이는 곧 한반도와 동북아 역사에 새길을 열어가는 획기적인 '그레이트 게임'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역사의 새로운 판도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온 마음으로 기대하고 기원한다.
그 시간에 나는 연길에 있는 평양과기대(PUST) 관계자 세 사람을 별도의 장소에서 만났다. 그중 두 사람이 선발대로 모레 27일 북경을 통해 평양 현지에 입국하게 된다. 실로 4년 반 만에 문호가 열린 것이다. 학사 운영과 구내 도로 포장 및 10월 3일 개교 15주년 행사에 필요한 업무 사항을 의논한 다음 대방측에 전달할 내용을 간추려 지시했다. 모두다 연변과기대 출신의 신실한 일꾼들이다.
4시가 넘어서자 전신자 교수(비서장)가 토론회에 빨리 오라고 독촉해서 더 이상 길게 얘기를 못나누고 기도만 해 주고 헤어졌다.
그리고 3분짜리 동영상을 보여 주면서 북한 실정에 생소한 그들에게 이해도를 높혀 주려고 애썼다. 특히 2021년 3월 PUST 공동운영총장에 취임한 이후 매년 미국과 캐나다, 남미 지역(브라질, 파라과이) 출장을 하면서 교수 리쿠르트, 공동연구 과제(산학협력부문)개발 및 펀드레이징에 대한 업무를 추진하는 중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자 모두들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중국 안에서 학교나 연구소에 매여 있는 자신들의 역할과는 너무나 판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자연히 터져나온 얘기가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현 정부 시책에 대한 불평이었다. 과거에는 각 지역 소수민족의 고유문화를 장려하고 그 가치를 존중해 주었는데, 지금은 각 민족 언어 교육도 폐지하고 간판을 걸더라도 한자(간자체)로만 쓰던가 아니면 한자를 위에 쓰고 그 밑에 소수민족 문자를 쓰도록 시행규칙이 달라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논문을 발표하거나 책을 내려고 해도 상부 심사를 통과하기가 어렵고 보류되는 경우가 많아서 교수들의 실망과 불만이 커지고 있으며, 또한 인사, 급여, 출장, 연금 등 여러 부문에서도 교수들에 대한 혜택이 과거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더군다나 국가 전반에 걸쳐 부동산 위기와 함께 국가경제와 개인소득이 밑바닥에 떨어지고 있어서 여가생활은 차치하고 생계까지 걱정을 해야 할 판이라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들의 얘기를 한참 듣고 있다보니 소수민족 지식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애환이 얼마나 심각한지 공감되었고, 또한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짊어져야 할 통치사회의 굴레는 기성세대에 비해 더욱 각박하고 강압적인 행태로 발전(?)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다.
겉으로는 식당 이름이 '삼꽃랭면'이라고 해서 평범하게 생각했는데 식당 내부가 호텔식당 만큼이나 화려하고 메뉴도 다양하게 나왔다. 더구나 인삼가루를 옥수수 분말과 섞어 면을 만든 자사 제품을 소개하는 벽보판에 2018년 '세계최대 물랭면'이라는 문구와 함께 여러 장의 홍보 사진이 걸려있었다. 냉면 하나를 만드는데도 현지 농산물과 특산물을 최대한 사용하고 거기에 창의적 아이디어로 신상품을 만들어 마케팅하는 수준이 보통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필자가 2008년에 <동북아 시대와 조선족>이라는 책을 썼을 때, 같은 동족으로서 연변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청년 및 지식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조선족 사회의 특질을 ‘변연문화(邊緣文化)’(이 용어는 필자가 조선족 사회의 특질을 규명하기 위해 학계에 처음으로 사용했던 용어다)라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이중구조적인 복합문화를 잘 선용해서 중국과 한국의 능선을 뛰어넘어 국제사회로 힘껏 뻗어 나가라고 격려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불과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여러 분야에서, 특히 의식주 생활문화 분야에서 중국내 타 지역이 따라오기 힘들 정도의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자 나는 감개 무량한 마음으로 '삼꽃랭면'의 특출한 맛을 즐겼다.
그러다가 내가 내몽고 적봉애서 온 하쓰 교수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쓰 교수는 몽골 민속의 특질인 초원의 감성을 잘 소화하는 노래를 불러서 평소에 우리 민박회의 전임 가수이기도 했다. 한달 전 몽골 울란바타르에 의료선교차 아웃리치를 갔을 때, 초원을 바라보며 하쓰 교수의 노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노라고 하자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기뻐했다. 하쓰 교수의 구성진 초원의 노래가 그 특별한 음색과 감성으로 마음 깊이 전해져 왔다. 장꾸엔 교수가 하쓰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춤을 추었고, 뒤이어 전신자 교수도 조선족 춤과 노래를 곁들여 흥을 돋구었다.
나도 덩달아 흥이 나서, 명색이 '민박회' 회장인데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청해서 노래를 불렀다. '선구자'를 불렀다. 1990년대 조선족 사회에 첫걸음을 디뎠을 때 부터 조선족 사람들과 가장 많이 떼창으로 불렸던 노래가 '선구자'다. 우뢰(?)와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손님으로 오신, 왕치산 부주석의 친구되시는 분도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분의 노래 실력이 보통 아니었다.
마치 성악을 전공한 분 같이 훌륭했다. 앵콜을 받아 한 곡을 더 부른 다음, 답례로 그는 이런 국제적인 친목 모임이 너무나 부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 밤 향연은 '민박회'의 우정과 사랑을 한껏 드높이는, 진정으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3편
#3. 세째 날(8월25일) 조선족민속원, 선봉임장의 여름 별장
사람들이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남방 내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었으며, 무엇보다 그들 가운데 많은 여성들이 가게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한국식 색조 화장으로 덧칠을 하고, 한국드라마에서 본 듯 한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광경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젊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이 많은 노인 여성들도 쪽도리를 쓰고 부끄럼 없이 사진사 앞에서 갖가지 포즈로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동안 억눌러 왔던 중국 여성들의 자기존재에 대한 본능적 미련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
십만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넓은 면적에 갖가지 민속마을형 한옥과 초가집을 지어 놓고 길과 담장, 우물터, 놀이광장, 유물 전시장, 정자 등을 적절히 배치한 다음 그 주변 경관을 조경식재와 특색있는 환경시설물로 짜임새 있게 조성해 놓은 조선족민속원을 한마디로 평가하라면, 세계 어디에 내 놔도 손색없을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해 주어야 할것 같다.
"세상 오래 살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 있다. 마치 연길 시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어제 저녁 '삼꽃랭면'집에서도 느낀 바였지만, 이제 연길은 옛날 연길이 아니고 조선족 사람들도 옛날 조선족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히 젊은 MZ세대들은 중국내 타지역 선진도시 청년들에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없는 외모와 영어 실력과 디지털 기능을 갖고, 한국, 일본, 미국, 유럽을 수시로 드나들 뿐 아니라 각자의 개성과 기량을 살려 1인 창업에도 도전하는 2.0 세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선 보이고 있다.
주인이신 이향단 여사의 '꽃떡'은 그동안 국제경연대회에 나가 3회 수상을 했을 뿐 아니라 작년에 길림성으로부터 성급(省給) 인간문화재로 추대되어 조선족 사회에서 크게 돋보이는 인물로 추앙을 받고 있다. 꽃잎 모양으로 만든 갖가지 떡 메뉴도 특별했고 현지에서 채취한 인삼오미자차도 일품이었다.
떡집 가게 안에서 우리들끼리도 사진을 많이 찍었지만, 그보다 나는 특실에서, 남자는 사모관대를 입고 여성은 신부 혼례복을 입은 채 서로 맞절을 하며 폐백을 드리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관광객들을 보며 너무나 의아스럽고 호기심이 나서 계속 그들의 행동과 표정을 관찰했다.
그 가운데 젊은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 머리가 허연 노인들까지 이런 장면의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걸 보면서, '문화의 힘'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우쳤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이고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한국에서는 요즘 '헬 코리아'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어요"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해 봤다. 중국 젊은이들은 이렇게 한국문화를 좋아하는데 왜 한국 청년들은 자살률이 세계 1위이고, 결혼도 기피하고 아이도 낳지 않겠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식당의 내부 인테리어가 한국에 있는 여느 한정식당 못지않게 깨끗하고 민속적인 분위기를 살려 잘 꾸며져 있었다. 룸과 홀이 적절히 안배되어 있고, 실내 곳곳에 그림과 도자기, 전통 창살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음식도 일품이었다. 도시락 형으로 각자 한 상씩 차려 주었는데, 토산 야채와 육류를 배합해서 된장국과 함께 먹도록 식단을 꾸민 비빔밥이 주메뉴였다. 참 맛있게 먹었다.
내가 음식점 이야기를 자주 하는 이유는 여행을 할 때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챙겨야 할것이 먹는 것, 즉 식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도중에 여러 곳을 다녀보고 있지만 저마다 특색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건강식 별미를 내 놓는 연길 식당의 수준이 보통 아니라서 계속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오찬 음식도 오래 기억될만한 식단이었다.
산림 숲이 좋았고 마을 바로 옆으로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물소리가 요란스럽고, 물살이 세고, 물이 깨끗했다. 3-4층 규모의 아파트가 10여 동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맨 뒷쪽 건물에 전 교수의 집이 있었다. 겨울에는 날씨기 너무 추워서 이용하지 못하고 주로 봄 부터 가을까지, 특히 한여름 피서철에 와서 휴가를 보내는 주거형 별장이었다.
그 마을에 조선족 내외가 방을 여러 개 갖고 있으며 민박 사업(식당, 매점도 운영)을 하는 분이 있어서 우리 일행들은 민박 아파트에 투숙했다. 각자 방을 배정 받아 짐을 갖다 놓은 다음 모두 전신자 교수의 집으로 모여 환담을 나눴다. 전 교수 얘기로 이곳이 내륙 깊은 산간오지라서 호랑이가 살고 있으며, 지난해 겨울에 호랑이가 인근 마을에 나타나 소 세 마리를 죽였다고 했다. 방 벽에 겨울 온난시설로 전기판넬을 걸어 놓았는데 표면에 '천도수근(天道修勤)'이라는 숙어가 적혀 있었다.
학자의 풍모가 엿보이는 좋은 말이었다. 하늘의 도를 알기 위해서는 성실 근면한 태도로 수련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 되었다.
군데 군데 밑줄을 그어 가며 읽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12년 전에 아들이 신촌 세브란스 교수로 있다가 개업해서 돈을 벌어야 북한의료사역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면서 세운 척추병원이 양재동에 있는 참포도나무병원이다. 그때 필자는 무조건 책을 쓰라고 권면했다. "저서가 있는 의사와 없는 의사는 천지 차이다" 라는 말로 윽박지르듯 강요했는데, 그때 동아일보 출판국과 조인하여 낸 건강도서가<자세혁명>이고 이 책은 나중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또한 영문판, 중문판으로도 책이 나왔다. 아버지로서는 참 고마운 일이었는데, 중국에 있는 손춘일 교수 여름 별장 서가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되니 더없이 반가왔다.(아이쿠, 아들 자랑 한번 했네요. 용서 해주세요)
연기를 피워가며, 서로 먹여 주며, 카스 맥주도 한잔씩 건네며, 웃으며, 떠들며, 물소리를 들어가며 먹는 여름 별장 만찬은 이 세상 그 어디서 먹는 저녁보다 더 맛있고 행복했다.
참으로 '민박회' 모임은 지극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소그룹공동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식사 중에 특별한 제안을 했다.
5년 전에 고아 박사(여, 중앙민족대 교수, *이번에 해외 출장 때문에 참석치 못했다)가 제주도에서 열린 학술세미나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인천공항에서 내게 전화로 인사를 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워 아이니, 워 아이니'란 말만 계속 여러 번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후 중국에서 민박회 회원들이 서로 인사를 할 때 '워 아이니'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그래서 제안합니다. 우리 중앙민족대 2006년 졸업생 민박회 회원들 모두를 한가족 처럼 사랑하자는 뜻으로 우리 자신을 '워 아이니 족'으로 칭하면 어떨까 싶어요. 그래서 중국 55개 소수민족 다음에 56개 소수민족으로 '워 아이니 족'을 세우는 게 우리들의 꿈과 비전을 영구히 간직하는 미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4편 #4. 네째 날(8월26일) 장백산 등정, 이도백하, 만경각
우리는 9시 이전에 장백산 초입에 있는 관리사무소(소재지 이도백하)까지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선봉임장 별장을 떠났다. 두 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이도백하(二道白河) 장백산관리센터는 다섯채의 산 모양 조형건축물로 세워져 있었다. 황갈색을 띈 FRP 외장재로 장백산의 이미지를 재현한 구조물이었다. 다행히 우리들은 제 시간에 맞춰 표를 끊고 경내로 입장했다. 우리 내외는 또 여권을 꺼내 검수인에게 비자 유무까지 확인해 주어야 했다. 경내 주차장에서 대형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올라간 다음 장백산 북코스로 올라가는 입구 관리센터에서 다시 여권을 보여 주고 10인용 봉고(전기차)로 갈아 탔다. 우리 일행이 9명이라서 한 차에 다 탈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비탈길 산행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계단목의 폭이 좁아서 한 사람씩 줄지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올라가는 길이 심한 정체현상으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 일행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발을 떼며 밀리듯 산정으로 올라갔다. 가는 도중에 비탈 위를 쳐다보니, 먼저 산정 능선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마치 한 줄에 꾀인 물고기떼 처럼 빽빽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나도 여러 번 백두산을 다녀갔지만 이번 처럼 이렇게 복잡하고 사람들이 많은건 처음 봤다. 그러나 다행히 하늘이 푸르고 너무나 청명해서 천지(天池)를 온전히 다 볼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마침내 산정에 올라 천지의 푸른 물 빛을 바라보니 내 가슴이 확 뚫리고, "천지만물 가운데 이토록 신비한 작품이 또 어디 있을 까"라는 외경심이 전신을 엄습했다.
우리 일행들은 가급적 뭉쳐서 다니려고 애썼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밀치고 들어오고, 틈새를 파고 들어오는 바람에 대부분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산정에 올라 갔다. 그러다 보니 한꺼번에 모여서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다. 줄지어 걸음을 옮기다가 두 명이든 세 명이든 보이는 대로 짝을 지어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겨우 사람들이 덜 붐비는 곳에서 가까스로 9명 전원이 천지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사진이 멋있게 잘 찍혀 있었다.
아무튼 ‘민박회’ 회원들과 함께 16년 만에 다시 올라와서 바라보는 장백산 천지의 위용은 한마디로 '신비'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천지는 한민족의 웅휘한 꿈을 담고 있는 성스러운 희망의 큰 그릇으로 내 마음에 깊이 내재해 있다. 이런 감흥과 각오가 결코 거짓이 아닌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얼토당토아닌 평가였지만, 그 때 당시에 중국 유일한 국제사립대학으로 출범한 연변과기대는 세인들에게 경이로움(?)을 안겨 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던 시절이다. 나는 기꺼이 그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세부 일정계획으로 연길에 도착하는대로 연변과기대를 방문하여 장학금을 전달한 다음 백두산 등정을 하도록 기획했다.
그런 다음 북경대를 방문하여 한중정치경제지도자간담회를 개최하여 양국 지도자들 간의 우의를 증진하는 프로그램을 짰으며, 그후 중경(重慶)으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을 살펴 본 다음 크루즈를 타고 3일간 장강 투어(*삼협댐 수몰 직전)를 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마지막 일정으로 크루즈의 종착지인 우한에서 상해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상해임시정부때 사용했던 건물을 살펴 본 다음 귀국하는 계획을 세웠다. 부인들 까지 합쳐 15명의 신한국당 중진 의원들이 참여한 중국 여행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모든 참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멋지고 유익한 여행을 다녀왔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 바람에 경북고 선배되시는 김윤환 의원께서도 당신 집(서초동 빌라)으로 필자를 초청하여 연변과기대 사역의 성과를 격려하고 치하해 주셨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당시 당 대표 비서실장을 지냈던 신경식 의원을 시켜 정계 입문할 뜻이 있는지 물어 오기도 했다. 그때 내 대답이 걸작이었다. "신 장관님, 제 지역구는 따로 있습니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제 지역구입니다" 농담같은 말이었지만 나는 진정으로 연변과기대를 통해 조선족 사회의 청년들을 기르고 그들과 함께 한민족의 새날을 준비 하는 일이 내 생애에 주어진 가장 거룩한 사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기에 연변과기대의 후속 프로젝트로 평양과기대를 세우고 지금껏 열심히 섬기고 있지 않은가! 무려 35년째 한 마음으로, 한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백두산에 오를 때 마다 나는 천지의 푸른 물 빛을 담고 있는 그 웅휘롭고 거대한 꿈(한반도 통일의 꿈)의 기개와 희망을 스스로 점검하며 하늘에 도움을 청하곤 했다.
그때 동참했던 분들 가운데, 나중에 가장 친하게 지냈던 분으로 이석연 변호사를 꼽을 수 있다. 8인회 일행은 먼저 연변과기대를 방문하여 학교 강당에서 특강(박세일 교수, 이석연 변호사)을 했고, 그후 백두산에 올라가 천지를 본 다음 그 푸른 물빛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산 뒤쪽으로 내려가 천지 못에 발을 담근 채 대한민국을 연호했던 기백이 아직도 가슴에 메아리 친다.
그때 당시 상해에서 다소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내가 상해 신항 답사를 건의했는데 그들이 순순히 따라 준 것이 지금 생각해도 고맙게 여겨진다. 왜냐면 그 거대한 삼협댐의 위용을 보고도 눈하나 깜박하지 않던 선진화재단 중진들이 상해 신항을 답사하고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분강개하는 심정으로 분발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무역항으로 세계 3위였던 부산항이 결국 상해 신항(*바다 안으로 32.5 Km 떨어진 돌섬에 엄청난 규모의 컨테이너 부두를 건설하고 이를 해상교량으로 연결한 국제무역항)의 등장으로 5위권으로 밀려 난 사례를 보듯이, 대한민국이 그동안 성취해 온 단기적 급성장에 취해 큰 미래를 내다 보지 않고 기득권에 안주하여 제자리 지키기만 하고 있다면 이는 나라를 팔아 먹는 짓과 똑 같다는 반성이 그들 마음속에 분연히 일어 난 것이다.
당시 국가 경제정책을 다루고 학계와 정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컷던 선진화재단 중진들에게 새로운 결단을 하고 분발하도록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필자는 박세일 군단과 함께 다녀온 장강 투어와 상해 신항 답사를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그것은 백두산에 올라가 대한민국의 큰 미래를 바라볼 때 갖는 꿈과 희망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리라!)
이번에도 내가 크게 깨우친 것은, 오래전에 기억했던 그 옛날의 이도백하 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도시이지만 도시 전체가 완전히 현대식 관광위락도시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중국 내지에서 년간 수십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몰려와도 수용할 만한 대형 숙박시설이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소공원과 야외풀장을 만들어 이용자들이 며칠간 편히 묵고 가도록 편의시설도 함께 확충해 놓고 있었다. 더구나 이도백하의 명물인 약 이백그루의 '미인송'을 집중 관리하기 위해 나무 마다 고유 번호를 매겨 놓고 전문직 조경관리인들이 매주 점검을 하고 있다니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0년 만에 방문한 이도백하의 이런 극적인 변화의 탈바꿈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나는 그동안 중국의 발전 속도가 얼마나 빠르게 진척되었는가 하는 실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발전상이 시진핑 주석이 기치로 내건 '중국몽'과 중국 공산당 중심의 애국주의가 합처져, 도시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에도 큰 물결이 지나가듯 흘러넘쳤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국가사회주의체제가 갖는 강점이 이런 것일거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역사발전의 전적인 요소는 아니다. 개인의 자유의지와 개성적인 역량을 소통하고 결집하지 못하는 체제는 결국 스스로 자가당착의 한계에 부딪혀 자충수를 두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중국의 위인들과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최근에 이르러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것은, 바로 이러한 다양성과 유연함을 잃어 가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거리감 때문일 것이다.
이번 짧은 여행 중에도 여러 번 여권 검열을 받은 이런 현상은 공안정치와 통제사회가 유발하는 상징적 사례 일 수 있다. 그 점에서 소수민족 출신 지식인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애환과 말 못하는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마음에 새겨진다.
북한에서 본 겨울 백두산 전경 그림(가로 8m, 세로 2m)이 특별히 눈에 띄었고, 한반도 지도 모양으로 포즈를 취하고 장고춤을 추는 '통일춤' 그림이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만경각 주인이 우리들을 직접 안내하면서 소상히 그림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 있는 작품의 작가 선생들이 대부분 작고했기 때문에 원본은 팔 수 가 없고 누가 그림을 원하면 북한 작가를 데리고 와서 모작을 해서 팔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가고 작품만 남아 있는 인생의 무상함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결론적으로 포럼의 주제는 "전통 문화를 이 시대의 디지털 세대에게 어떻게 계승, 발전 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인가"로 정하고 사회학, 국제관계, 인류문화사 등 몇개 분야로 나눠 토론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기조 연설은 북경대 원로 양---- 교수가 하고, 좌장은 손춘일 교수가 맡아 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내년 8월에 개최할 일이니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만, 민박회 회원들이 미리부터 1년간 공부해서 각자 논문 형식으로 리포트를 낸 다음 이를 포럼에서 발표하고 그 후 내용을 가다듬어 2026년 민박회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로 단행본을 내자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민박회 회원들이 2025년 학술 포럼에 대해서는 회장단에 전적으로 위임해 주었기에 이 안건의 기본 방향을 미리 의논하고 떠나려고 전신자 교수 내외와 마지막 업무 협의를 거친 것이다. 그런 다음 다같이 연길 공항으로 가서 우리들은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멀리 떠나는 사람 같지 않게 내일이라도 금방 돌아올 것 같은 마음으로 그들과 헤어졌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으로, 인정으로 우리는 모두 한 가족같은 사람들이기에 전혀 남같이,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 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것도 병이런가! 조선족 사회와 함께해 온 이 수많은 세월과 우여곡절 속에 우리의 우정과 사랑은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가슴을 적신다. 두만강 강바람이 스쳐지나가는것 같다. 몇 년 전 경북고 동창들이 친구들의 호를 지어주는걸 장려했던 적이 있다.
그때 누가 내 호를 만강(滿江)이라 지어 주었다. 하도 두만강 얘기를 많이 하니까 그랬던거다. 나는 호를 지어 부르는걸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일 호를 짓는다면 두만강에 흘러 넘치는 푸른 물결이 되어 저 동해 바다로, 저 넓은 태평양 바다로 흘러 가는 ‘만강(滿江)’이 되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글쓴이 / 이승율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은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역임, 연변과학기술대학 대외부총장 역임,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역임,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중국) 중앙민족대학 민박동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으며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동북아 전문가로서 각종 국제포럼 및 한반도 통일 사역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지금은 평양과학기술대학교 3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남북한 소통과 교류협력에 이바지하고자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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